지난 12월 29일 보훈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고 발표했다. 보훈부는 "이승만은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고,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한인자유대회 개최와 한미협회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라고 꼽은 까닭을 밝혔다. 하지만 이런 보훈부의 발표에 고개를 끄떡일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정말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뛰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국민을 버린 이승만이 웬 국부?
이렇게 보훈부가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은 데는 보훈부의 전 장관과 현 장관의 ‘이승만은 국부’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지난해 8월 11일 한국일보의 기사에 보면 당시 박민식 장관이 "이 전 대통령의 공과 과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럴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공이 90%, 과가 10%라고 본다. 우상화라는 표현은 합당치 않다."라고 말하면서 이승만을 국부로 치켜세웠다. 하지만, 국민이 박 전 장관의 이런 생각에 손뼉을 쳐줄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기사에 댓글을 단 많은 누리꾼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탄핵받았으며, 4·19혁명 이후 국민에게 쫓겨 하와이로 달아난 사람이 어찌 공이 90%인 국부일 수가 있느냐고 반박한다. 이에 더하여 6·25전쟁 중 국민에게 안심하라고 방송하고 자신은 한강다리를 폭파한 다음 달아난 것을 지적하면서 국부란 사람이 이렇게 국민에게 엄청난 거짓말을 한 것은 어찌 볼 것이냐 묻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상징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다고 많은 사람이 믿고 있다. 여기에 분명히 아니라고 답할 수 있는가?
이승만,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대통령직 탄핵당해
지난해 오마이뉴스 12월 19일 치 <김종성의 ‘히, 스토리’>에 보면 “이승만은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그는 손병희ㆍ이승훈ㆍ한용운 등이 포함된 민족대표 33인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다. 3·1운동 일주일 전인 그해 2월 25일 그는 일본을 대신해 국제연맹이 한국을 통치해달라는 위임청원서를 작성해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이 일로 인해 단재 신채호로부터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 하지만, 그는 1925년 3월 23일 탄핵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가보훈부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근거로 들면서 독립운동의 큰 주역으로 보았지만, 1925년 3월 23일, 임시정부는 그를 임시대통령직에서 탄핵했다. 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가 작성한 탄핵서는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 수습과 대업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승만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아서 우러러봐야 하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숭배하는 거야 말릴 수가 없겠지만,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아 모든 국민이 우러르게 할 수는 없다. 이제라도 보훈부는 1월의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지우고 다시 꼽아야만 한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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