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군일기》, 조선 1634년, 44.5×31.0cm, 국보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아래 《 실록》) 가운데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 시기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사실을 연월로 기술하는 편찬 방법)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1624년(인조 2)부터 편찬이 시작되었고, 1633년(인조 11) 중초본(中草本)’ 1부가, 이듬해 5월에 중초본을 검토하고 옮겨 쓴 정초본(正草本) 2부가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광해군일기》 중초본’은 태백산 사고(경북 봉화)에, 정초본 2부는 정족산 사고(강화도)와 적상산 사고(전북 무주)에 1부씩 봉안(奉安)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해군일기》는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었던 1책(권55-58)으로, 1612년(광해군 4) 7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의 기록을 담았습니다.
비운의 임금 광해군
광해군은 1575년(선조 8)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1553~157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전란의 수습에 힘썼으며,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했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뒤 대동법(大同法,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제도)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궁궐을 무리하게 중건하거나, 왕권에 위협이 되는 계모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와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숙청하는 등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리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 교동도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1641년(인조 19) 67살로 유배지 제주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해군은 반정으로 물러났으므로 사후 임금에게 주어지는 묘호(廟號)를 받지 못했습니다. 남양주에 있는 무덤도 다른 왕릉보다 규모가 작고, 묘역을 수호하는 석물(石物)도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 광해군 무덤, 경기도 남양주, 사적, 2021년, 필자 촬영
《광해군일기》의 봉안과 전래
《실록》은 임금의 재위 기간에 기록한 사초(史草)와 관청의 기록을 정리한 시정기(時政記) 등을 바탕으로 초초ㆍ중초ㆍ정초 등의 단계를 거쳐 만들어집니다. 《실록》이 편찬되면 국가의 기밀 누출을 막기 위해 초초본과 중초본을 없애는 세초(洗草)를 하고, 정초본을 인쇄해 각지의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1634년(인조 12) 《광해군일기》 정초본 2부가 편찬되었으나 조정의 여러 사정으로 인쇄하지 못했고, 중초본과 정초본을 임진왜란 이후 새로 지은 정족산ㆍ태백산ㆍ적상산 사고로 옮겨 봉안했습니다.
▲ 정족산 사고 장사각, 20세기, 건판126(왼쪽), 태백산 사고 실록각, 20세기, 건판1836(가운데), 태백산 사고 실록각의 내부, 1912년, 건판1839
일제강점기에 사고가 철폐되자 《광해군일기》 정초본 1부(적상산 사고본)는 창경궁 장서각으로, 또 다른 정초본 1부(정족산 사고본)와 중초본(태백산 사고본)은 경성제국대학(광복 이후 서울대학교)으로 옮겨졌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대학교에서 보관하던 《실록》은 부산으로 옮겼으나 장서각의 《실록》은 미처 옮기지 못했고 결국 북한군이 평양으로 옮겨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해군일기》의 내용과 특징
1973년 국내에 현전하는 《실록》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국보 지정에서 빠진 《실록》이 추가로 확인되었습니다. 2017년 문화재청의 정밀 조사를 통해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서 96책의 《실록》이 확인되어 2019년 국보로 추가 지정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해군일기》는 권55-58에 해당하는 1책으로, 1612년(광해군 4) 7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의 정치ㆍ외교 등 현안이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책의 앞면에 ‘이왕가 도서지장(李王家圖書之章)’과 ‘무주 적상산사고 소장(茂朱赤裳山史庫所藏) 조선총독부 기증본(朝鮮總督府寄贈本)’ 등의 소장인(所藏印)이 남아 있어 적상산 사고에 봉안한 정초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해군일기》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성종실록》ㆍ《인조실록》ㆍ《효종실록》과 함께 그동안 국내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적상산 사고본 《실록》의 존재를 일부나마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 《광해군일기》 첫 면의 소장인 1 ‘이왕가도서지장’(왼쪽), 《광해군일기》 첫 면의 소장인 2 ‘무주적상산사고소장 조선총독부기증본’
국립중앙박물관(허문행) 제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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