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15,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놀이’와 ‘놀음’

튼씩이 2024. 1. 27. 10:51

‘일하다’와 짝을 이루는 ‘놀다’는 일제의 침략을 만나서 갑자기 서러운 푸대접을 받았다. 저들은 우리네 피를 남김없이 빨아먹으려고 ‘부지런히 일하기[근로]’만을 값진 삶의 길이라 외치며 ‘노는 것’을 삶에서 몰아냈다. 일제를 몰아내고 분단과 전쟁과 산업화로 이어진 세월에서는 목숨 지키는 일조차 버거워서 ‘놀다’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놀다’는 ‘일하다’를 돕고 북돋우고 들어 올리는 노릇이고, ‘일하다’에 짓눌린 사람을 풀어 주고 살려 주고 끌어올려 주는 노릇이며, ‘일하다’로서는 닿을 수 없는 저 너머 다함 없는 세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데려다주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네 삶에서 밀려난 ‘놀다’를 다시 불러들여 제대로 가꾸는 일에 슬기를 모아야 하는 것이다.

 

‘놀다’는 네 가지 이름씨 낱말로 우리네 삶 안에 살아 있다. 움직씨 ‘놀다’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놀기’, ‘놀이’, ‘놀음’, ‘노름’이 그것들이다. 그러니까 움직씨 ‘놀다’가 ‘놀기’라는 이름씨로 탈바꿈하여 벌어져 나오면, ‘놀이’를 거치고 ‘놀음’에 닿았다가 마침내 ‘노름’까지 가지를 치며 나아가는 것이다.

 

‘놀기’는 ‘놀다’를 이름씨로 바꾸어 놓았으나 제 몫은 여전히 ‘놀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놀이’에 이르면 일의 고달픔을 씻고 뛰어넘는 몫을 다하기에 모자람이 없도록 틀을 갖추며 가다듬어진다. 그리고 ‘놀음’에 닿으면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드높여지는데, 그것이 지나쳐서 ‘노름’에까지 나아가면 ‘일하다’처럼 몸도 고달프고 마음까지 망가뜨리는 노릇에 이르고 만다.

 

▲ 놀이와 노름의 차이는?(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놀이’는 도리도리 짝짜꿍같이 몸으로 혼자서 하는 것에서 소꿉놀이나 술래잡기같이 몸으로 여럿이 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팽이치기나 연날리기같이 노리개를 가지고 혼자서 하는 것에서 강강술래나 줄다리기같이 노리개를 가지고 여럿이 하는 것으로 나아가 마침내 온갖 것이 어우러지는 ‘대동 놀이’에 이른다. 몸으로 하는 짓과 춤과 노래에서 비롯하여 노리개를 가지고 하는 짓과 소리와 그림으로 나아가는 ‘놀이’는, 수많은 이른바 스포츠와 예술로 저마다의 틀을 갖추어 영원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다.

 

이들 ‘놀이’는 ‘일’과는 아주 달리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준다. 그리고 ‘일’로써는 닿을 수 없는 정의와 자유와 평등이 그 안에 살아 있어서, 삶에서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이런 경험은 사람이 누구나 꿈꾸는 영원의 삶에 다다른 것과 같아서 아무도 뿌리칠 수 없는 노릇이다.

 

‘놀음’은 ‘놀이’가 좀 더 가다듬어지고 갈라진 것이다. 맑고 밝고 깨끗하여 사람과 삶을 씻겨 주는 ‘놀이’가 그런 본디의 몫을 지니면서 더욱 갈고 닦이면 ‘놀음’이 된다. ‘놀이’가 ‘놀음’으로 갈고 닦이고 가다듬어지면 저절로 여러 가지로 갈래가 나누어지게 마련이다. 일테면 ‘탈놀이’는 탈을 쓰고 노는 온갖 놀이를 싸잡아 쓰는 말이라 두루 쓰이지만, ‘탈놀음’에 이르면 ‘하회별신굿탈놀음’, ‘동래들놀음’, ‘진주오광대탈놀음’같이 틀을 갖추어 가다듬어진 탈놀이의 하나를 이르게 되는 것이다.

 

‘놀이’가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목숨의 뒷바라지 쪽으로 과녁을 옮기면서 ‘놀음’으로 가다듬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른바 산업 사회로 넘어와서 갖가지 스포츠와 예술이 이런 길로 빠져서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고, 이것을 인류 문명사의 커다란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놀음’이 자칫하면 ‘놀이’의 참된 몫을 팽개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음’은 ‘놀이’를 훨씬 빛나고 아름답고 값진 것으로 끌어올린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노름’은 ‘놀음’보다 더욱 가다듬어지면서 ‘놀다’에서 멀리 떠난 것이다. ‘놀음’이 먹고 입고 자는 일을 겨냥하여 돈 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노름’에 떨어지는 것이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기보다 돈에 쏠려 ‘노름’으로 떨어지면 그것은 일보다 오히려 더욱 고달픈 노릇에 다다르고, 자칫하면 거기 빠져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로부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놀이’와 ‘놀음’에 지나치게 빠질까, 걱정하던 것은 바로 ‘노름’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