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사(正朝使) 유수강(柳守剛)이 먼저 통사(通事)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희고 두꺼운 닥지[白厚楮紙]를 구합니다.’ 하니, 조지소(造紙所, 조선 시대, 종이 뜨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보내어 준비하게 하였다.” 이는 세조실록 30권, 《세조실록》 9년(1463년) 2월 19일 치에 보이는 것으로 명나라 황제가 희고 두꺼운 닥지를 요청했다는 기록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 중국인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우리 종이를 ‘계림지(鷄林紙)’라 불렀고, 이후 ‘고려지(高麗紙)’, ‘조선지(朝鮮紙)’라고 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송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고려나 조선 사신들이 들고 가는 선물에 ‘종이’가 있었다는 데서 우리 종이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때 중국 사람들은 우리 종이를 비단으로 만들었다고 착각하기까지 했는데, 명나라 《일통지(一統志)》 때 와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확인한 기록이 보인다고 합니다.
▲ 전통한지 외발뜨기 모습, 2007년 원주한지문화재에서
조선 영조 때 서명웅이 지은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에 보면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를 견줄 때 반드시 고려지를 으뜸으로 쳤다. 우리나라의 종이는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서 질겨지며 더욱 고르고 매끄러워졌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어 한국 종이의 우수성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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