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는 울고 있어요.”
2017년 3월 초, WBC라는 이름의 국제야구대회가 열렸다. 1, 2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지만, 3회 대회 때 예선 탈락의 쓴맛을 본 우리로선 명예회복이 절실했다. 게다가 예선전이 우리나라 고척돔에서 개최됐으니, 여러모로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한국은 “이 나라도 야구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에 2 대 1로 지는 등 시종 졸전을 거듭한 끝에 또다시 예선 탈락하고 만다. 일정 기간 이상 국내 프로 경기에서 뛰면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FA제도 덕분에 수십억원을 손에 쥔 선수들이 많았지만, 그들 중 자기 몸값에 걸맞은 실력을 보인 선수는 드물었다. 우리 선수들에 대한 질타가 쏟아진 건 당연했다. 특히 선수들의 태도가 비난의 대상이 됐다. 경기 중 장난을 치거나 밝은 표정을 짓는 모습이 그대로 TV에 나와서였다. 가장 논란이 된 선수는 두산의 김재호였다. 두산 팬이라 아는 사실이지만 김재호는 얼굴 구조상 늘 웃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걸 잘 모르는 팬들은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라며 그를 질타했다.
“기가 막혀서 웃었습니다.”
2014년 10월,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이 제1회 판교테크노밸리 축제를 열었다. 유명가수들이 축하공연을 해 예상보다 많은 인파가 몰렸는데, 행사를 좀 더 잘 보고 싶었던 관람객들이 환풍구 위로 올라간 게 문제였다. 환풍구 덮개가 사람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바람에 16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며칠 뒤 열린 안전행정위원회는 관할지역 시장인 이재명에 대한 성토로 점철됐다. 국민들의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얼마 있지도 않은 복지를 줄이려는 정부로서는 튼실한 복지정책으로 화제가 된 이 시장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듯했다.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강기윤이 총대를 멨다. “시장님께서 지난번에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세월호 참사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지요. 남의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혹독하게 평가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된다.” 질타는 계속됐다. 이 시장이 답변하려 할 때마다 강기윤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답변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자 이 시장은 허허 하고 웃어버렸다. 강기윤도 강기윤이지만 옆에 있던 조원진 의원이 열을 받았다. “지금 이 방송을 국민들이 다 보고 있는데, 성남시장이라는 사람이 실실 웃고 그래서 되겠습니까? 여기가 웃는 자리예요, 지금?” 이유가 무엇이든 국민을 대표한 국회의원 앞에서 웃었다는 건 분명 이 시장이 잘못한 것이기에, 그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NG 컷을 비신사적으로 편집한 의도를 정말 모르겠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300여명의 희생자를 내며 침몰한 그날, 청와대 대변인 민경욱은 기자들 앞에서 사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늘 오전 진도 인근에서 발생한 여객기…여객기? 난리났다. 하하하하.” 이 장면이 방송으로 나간 건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뒤였는데, 해당 장면은 많은 국민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세월호를 ‘여객기’라고 잘못 얘기한 것이니, 그 장면이 NG인 건 맞다. 수많은 방송인들이 NG를 내면 웃는다. 하지만 그 자리는 초대형 재난사고를 브리핑하는 자리였다. 모든 국민들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던 그때, 청와대 대변인이 같이 울어주지는 못할망정 환하게 웃는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그는 사과하지 않았고, 물러나는 순간까지 온갖 궤변으로 박근혜를 옹호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2017년 3월12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4년간의 청와대 관저생활을 청산하고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예정보다 일찍 간 이유는 그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대신 최순실의 개인적 이익을 챙기려 대통령의 권한을 썼기 때문이었다. 이는 명백한 헌법 위반으로,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헌재마저 8 대 0의 만장일치 선고를 내리기에 충분했다. 비리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 귀가하는 심정은 어떨까? 많은 회한과 반성이 교차되는지라 표정은 착잡할 테고, 자신의 모습을 누가 볼까봐 초조한 마음도 있을 것 같다. 그게 대통령이라면 자신을 믿고 뽑아준 국민들에 대한 미안함까지 추가돼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박근혜는, 웃었다. 혹시 과거의 자료화면을 틀어준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개념의 박사모들에게 둘러싸인 채 박근혜는 시종 환하게 웃고 있었다. 헌재에 불복하겠다는 메시지까지 던진 걸 보면, 그의 마음속에 ‘반성’이란 두 글자는 아예 없는 모양이다.
박근혜의 범죄는 WBC에서 조기 탈락한 야구대표팀과 비교될 수 없다. 행사장의 안전관리를 못했다고 야단맞은 이재명 시장과도 차원이 다르다. 이 시장이 웃는다고 질타했던 조원진이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맞다. “지금 이 방송을 국민들이 다 보고 있는데, 탄핵당한 대통령이 실실 웃고 그래서 되겠습니까? 여기가 웃는 자리예요, 지금?” 하지만 그 조원진은 그렇게 질타하는 대신 웃는 대통령 앞에서 딸랑거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통합’보다 ‘적폐 청산’이 더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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