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마십시오. 저희 의사들이 당신을 돕고 당신의 아이를 지킬 것입니다.”
2009년 12월, 프로라이트 의사회가 출범했다.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낙태 시술 근절을 목표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이듬해 2월,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병원 3곳과 의사 8명을 검찰에 고발한다. 산부인과 의사가 동료의사를 고발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컸다. 그간 암암리에 낙태를 해오던 산부인과들이 시술을 중단한 것이다. 낙태를 하러 온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을 듣고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런 현상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다. 루마니아는 낙태가 전면 금지됐던 20여년 동안 모성사망률이 21에서 128로 증가했지만, 1989년 낙태금지법이 철폐되자 한 해 만에 이 수치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지금도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뜨개바늘이나 막대기 또는 옷걸이로 자가 낙태를 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또 목숨을 잃는다. 옷을 거는 도구인 옷걸이가 엉뚱하게도 낙태합법화 운동의 상징적인 도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나라도 이제 낙태금지법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만든 이 법이 오히려 산모의 목숨을 앗아간다니, 이거 문제가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하는 것을 허용하고, 덕분에 그 나라 여성들은 안전한 곳에서 낙태 수술을 받는 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먹는 낙태약 ‘미프진’도 의사 처방만 있으면 얼마든지 복용할 수 있다. 임신 초기에 효과가 좋은 미프진은 선진국은 물론 잠비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콜롬비아, 심지어 북한 등등 웬만한 나라에선 죄다 허가를 받은 상태지만,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브로커가 추천하는, 성분이 뭔지도 모르는 가짜 약을 비싼 돈을 주고 사먹고 있으니, 낙태금지법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지 의문이 든다.
고무적인 점은 남성들이 댓글을 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네이버에서도 낙태합법화에 대한 지지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낙태에 관한 기사마다 추천수가 가장 많은 베스트댓글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낙태합법화 적극 지지함.” “나도 남자인데 낙태는 여자 인권 문제인 것 같다. 낙태금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보다 지금 있는 산모의 인권을 무시한다.” “싸튀충 (사정하고 도망가는 남성을 지칭함) 처벌법부터 만들던가. 애는 뭐 혼자 만들었냐?” “낙태 반대하는 놈들 실명을 밝혀라. 그놈들에게 강제 입양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17일 낙태 수술을 한 의사의 자격을 1개월 정지하는 행정규칙을 공포해 논란을 일으켰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더 이상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년 전 그랬던 것처럼 낙태를 하러 간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에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 혹시 낙태금지를 강화하는 게 출산율을 높이려는 계략이라면, 이건 번지수가 틀렸다. 프랑스 등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의 출산율이 우리보다 훨씬 높으니 말이다.
1879년 여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마거릿 생어는 열한 명의 자녀를 낳고, 그것도 부족해 여러 차례 유산을 거듭하던 어머니가 한창 나이에 죽는 걸 보고 피임에 관해 생각한다. 생어는 “어머니가 될지 아닐지를 여성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16년 미국 최초로 산아제한 클리닉을 연다. 그를 불편해한 권력자들 때문에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생어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과 싸웠다. 그 결과 지금은 피임을 안 한다고 뭐라고 할지언정, 피임을 부도덕한 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낙태가 여성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2018년 5월, 아일랜드에서는 낙태 허용을 위한 헌법 개정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68%가 낙태금지법 폐지에 투표했다. 놀라운 점은 아일랜드가 보수적인 가톨릭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우리가 1등은 못할지라도 꼴찌는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우리 정부는 왜 자꾸 뒤로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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