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회로(CC) TV 속의 남성이 여성 쪽으로 걸어간다. 남성이 지나가자마자 여성은 남성을 불러 세우고 격하게 항의한다. 그 남성이 자기 엉덩이를 만졌다는 것이다. 소위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다. 이 사건이 화제가 된 것은 해당 남성-A씨-의 아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뒤였다. 그 글에 따르면 A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며, 높은 분을 모시는 자리여서 성추행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당 여성, 즉 피해자가 사건 직후 합의금 1000만원을 요구했다는 것도 수상쩍다. 그럼에도 판사가 피해자의 말만 믿고 징역 6개월을 선고했으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남성들이 이런 판결을 내린 판사를, 그리고 피해자를 욕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해당 CCTV로는 성추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그게 곧 피해자를 안 만졌다는 얘기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흥분했고, A씨에게 공감했다. 심지어 A씨를 위해 모금운동을 하자는 의견도 제법 있었다. 요즘 놀이터로 전락한 청와대 청원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 번째로 공개된 CCTV는 성추행 여부에 대한 판단을 보다 잘 내릴 수 있게 돕는다. A씨가 현관 쪽에 서 있는데, 피해자 여성이 걸어와 복도 쪽 방문을 열려고 한다. A씨가 그 여성을 돌아보더니 그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손을 바깥쪽으로 뻗는다. 곧바로 A씨가 항의하고, 그 뒤 양쪽 진영 간에 대치가 이어진다. 이 와중에 A씨는 도망친다. A씨 아내가 쓴 글에도 문제점이 발견됐다. 피해자는 합의금을 요구한 적이 없었고, 먼저 합의금 얘기를 꺼낸 쪽은 오히려 A씨였다. 어려운 자리였다는 아내의 글과 달리 A씨는 폭탄주 15잔을 마셨다고 했다. 게다가 A씨는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고, 거짓말탐지기 결과도 ‘거짓’이었다. 남성들의 분노를 촉발한 첫 글에 A씨에게 불리한 대목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판단을 달리할 법도 하지만, 남성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만졌다는 증거는 있어요?” “증거 없이 징역을 때린 게 문제다.” “판사는 각성하라!”
사실 성추행은 증거가 남지 않는 범죄다. ‘슴만튀’ ‘엉만튀’라는 말처럼 슬쩍 만지고 도망치는데 진술 말고 무슨 증거가 남겠는가? 대부분의 성추행과 달리 곰탕집 사건은 오히려 증거가 많은 사건이다. 그럼에도 ‘증거’ 운운하는 이들은 성공한 성추행은 처벌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음주운전, 살인, 사기 등등 범죄와 관련된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올 때마다 남성이 주를 이루는 누리꾼들은 일단 가해자를 욕하고, 다음으로 ‘처벌이 약하다’며 판사를 비난한다. 하지만 성범죄의 경우 남성들이 가해자에게 동조하며 그편을 드는 일이 꽤 자주 일어난다. ‘그랩’으로 유명한 윤창중이 박근혜 정부의 대변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국제꽃뱀으로 몰았을 남성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실수로 여자의 신체부위를 만져서 성범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고의와 실수를 구분할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어쩌면 성범죄의 90% 이상이 남성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통계가 이유일 수 있겠다. 같은 남성으로서 만지고픈 네 마음을 이해한다,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인데 어찌 너를 욕할 수 있겠느냐, 이걸 문제 삼는 여성이 나쁜 거야, 라는 게 그들이 가해자에게 빙의하는 이유가 아닐까?
‘성전카페’라는 곳이 있다. 성범죄 전문 상담 카페의 준말로, 4000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 중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가관이었다. 한 남성이 성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하면 형을 덜 받을 수 있는지 묻는 글을 올리면 경험자와 법률가들이 댓글로 방법을 알려준다. “미성년자인지 몰랐다고 잡아떼세요.” “합의하에 즐겼다고 하세요.” “쪽지 보내주시면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성범죄자가 결국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는 글을 올리면 축하세례가 이어진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오늘부터 발 뻗고 주무세요.” “부럽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카페 덕분에 무혐의를 받았다며 고마워한다. 성범죄의 재범률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카페는 더 많은 성범죄가 저질러지는 세상을 위해 애쓰는 중이다. 이런 카페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카페에 가입을 안 한 이들도 인터넷 댓글로 성범죄자를 응원함으로써 피해여성의 싸우고자 하는 의욕을 짓밟는다. 이렇게 남성들이 가해자를 위해 연대하는 반면, 여성들은 대부분 피해자를 위해 연대한다.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가 됐을 때, 수많은 여성들이 강남역에 모였다. 피해자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고, 자신이 살아남은 게 단지 운이 좋아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규탄시위 역시 몰카범이 남성인 경우도 엄하게 처벌해 달라는 것일 뿐, 가해 여성을 편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정부가 혜화역에 모인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지난 게시판 > 서민(단국대 의대교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금을 아끼려면 (0) | 2018.12.14 |
---|---|
남자 역차별론은 허구다 (0) | 2018.11.07 |
시대착오적인 낙태 논란 (0) | 2018.09.08 |
기득권의 권리와 의무 (0) | 2018.08.12 |
사법부 전가의 보도 ‘다만’과 ‘그러나’ (0) | 2018.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