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서민(단국대 의대교수)이야기

TV는 대통령을 놓아주라

튼씩이 2016. 2. 29. 16:40

“혹시 기생충 박사님 아니세요?”

 

지하철에 서 있는데 나이 드신 여성분이 내게 말을 건넨다. TV에서 나를 봤다고 했다. 지금은 이런 것에 제법 익숙해졌지만, 처음 이런 일을 겪을 땐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날 알아봐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이제 나쁜 짓도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오래 날 지배한 감정은 우쭐함이었다.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살았고, 누군가가 날 모른 체하고 지나가면 속으로 ‘아니 날 몰라보다니!’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존경하는 분과 팟캐스트를 녹음했다. 녹음이 끝나고 같이 밖으로 나갔는데, 길을 가던 몇몇 분들이 날 알아본다. 의아했다. 내 옆에 계신 분은 <헌법의 풍경>을 비롯해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내신, 나와는 비교도 안될 훌륭한 분인데, 그분을 몰라보고 날 알아보다니 이건 세상이 잘못돼도 보통 잘못된 게 아닌 것 같았다.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을 해본 뒤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방송은 거기 출연한 사람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 유명세는 그 사람이 훌륭한 것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남들이 알아보는 사람이 됐다는 게 결코 우쭐해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혹시 누가 날 알아봐도 들뜨지 않으려 애썼는데, 나중에 방송에서 잘리고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간 뒤에도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다 이런 정신수련 덕분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이니까 방송에 나가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고, 방송에 나가는 분들 중 실제로도 훌륭한 분들이 많을 테지만, 원래 훌륭했던 분들도 우쭐하게 만드는 게 방송의 무서운 점이리라. ‘방송 나가더니 변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게 괜한 일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 박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라는 말이 연관 검색어로 뜰 만큼 훌륭한 분이셨다. 대표 시절 멀쩡한 당사를 놔두고 천막에서 업무를 보신 건 전설적인 일화고, 빗발치는 환원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수장학회를 지켜내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대통령이 된 뒤 박 대통령은 변했다. 야당 시절 “역사를 정권이 재단해선 안된다”고 해놓고선 지난해 말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단행했고, 대선 때 댓글을 단 국정원에 셀프개혁을 주문함으로써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그 밖에도 복지공약을 외면한 채 민주주의의 기본인 삼권분립을 유린하는 데 앞장서는 등 비판받을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 좌파들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는 모양인데, 방송활동을 몇 년이라도 했던 내가 보기엔 이게 다 방송 탓이다. 미디어오늘이 2015년 1월부터 191일간 지상파 3사 메인뉴스의 박 대통령 관련 보도를 조사해 본 결과 대통령의 출연 빈도는 실로 엄청났다. SBS는 162건, KBS 155건, MBC 152건이었는데, 그 기간 중 휴일이 30일가량 껴 있다는 걸 감안하면 거의 매일 한 번씩, 그것도 지상파 황금시간대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물론 대통령이 하는 일 중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많다보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저 보도들 중엔 대통령의 근황을 보도해야 한다는, 독재정권 시절부터 내려온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도 많다. 예를 들어 ‘xx와 밥을 먹었다’든지 ‘xx와 만나서 환담했다’ 같은 것도 있던데, 이런 걸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할까? 이런 식으로 매일 나오다보면 제 아무리 간디 같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변할 수밖에 없는데, 간디에 조금 못 미치는 박 대통령이 변한 건 너무도 당연했다. 시간이 많다면 정신수련으로 극복할 수 있겠지만, 워낙 바빠서 7시간의 짬도 내기 힘든 대통령에게 그런 걸 요구하긴 어렵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최소한 지상파만이라도 대통령을 그만 놔줬으면 좋겠다.

 

비단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TV에서 보도할 만한 뉴스는 차고 넘친다. 아리랑TV 사장의 비리를 밝히는 데 공을 세운 따님을 출연시킨다든지, 요즘 진정한 충신이 뭔가를 보여주고 있는 최경환 전 부총리의 일대기를 보도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물론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할 때는 보도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난 3년을 돌이켜보라. 대통령이 한 중요한 일이 대체 몇 개나 되는가?

 

변하기 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 말고도 지상파의 대통령 외면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는 많다. 그 대표적인 게 욕을 덜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천만이 넘는 좌파가 살고 있고, 그들은 대통령이 말씀을 하실 때마다 거품을 문다. 하지만 아예 대통령 보도를 안 해 버리면 그들은 목표를 잃은 미사일처럼 방황하다 제 풀에 쓰러질 테니, 잘만 하면 좌파척결도 이룰 수 있다. 다행히 종편에서 박 대통령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대통령 입장에선 그리 서운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제안한다. 지상파 뉴스는 대통령 보도를 중단하라. 원칙과 신뢰의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