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이 종영된 날, 모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혜리가 해낼 줄이야! 무시해서 미안해.” 제대로 연기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걸그룹 가수가 인기시리즈의 주인공 역할을 해낼지 걱정했는데, 그게 기우였다는 것. 아닌 게 아니라 <응팔>이 기록한 20%의 시청률은 공중파에서도 잘 보기 힘든 수치다.
이 드라마에 나온 출연자들의 연기는 다 출중했지만, 극중 주인공 ‘덕선이’를 위해 태어난 듯 보이는 혜리가 아니었던들 <응팔>이 이렇게 화제가 됐을까 싶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혜리가 천재 바둑기사 최택과 함께 중국에 갔을 때였다. 말이 안 통하는 호텔직원에게 몸짓 발짓을 동원해가며 “방이 너무 추워서 입이 돌아갔다”는 얘기를 하는 장면은 나처럼 혜리를 불신했던 모든 사람을 겸연쩍게 만들었다.
혜리가 빛나는 연기를 한 비결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극중 배역이 혜리의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 아닐까. <응팔>의 ‘덕선’이 그랬듯 실제의 혜리 역시 상대가 누구든 기죽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염치 불구하고 일단 먹고 봤을 것 같다. 만약 김태희였다면, 지금보다 나이가 십년쯤 더 젊다 해도, 이 배역을 소화하는 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지금 난 김태희가 연기를 못한다고 하는 건 아니다. 그녀의 연기력은 작년 후반기의 화제작 <용팔이>를 비롯해 수없는 히트작을 낸 것으로 이미 증명됐다. 그럼에도 김태희에게 ‘덕선이’가 어울리지 않다고 한 이유는 그녀의 삶이 엄청난 자기관리로 점철됐으리라는 추측 때문이다.
한창 놀고 싶은 중·고교 때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나처럼 못생겨서 할 수 없이 공부한 거라면 모를까, 빛나는 미모를 가진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그녀의 자기관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김태희가 데뷔 이후 16년째 톱 탤런트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이리라. ‘덕선이’에 김태희가 어색한 것처럼, 혜리 역시 <용팔이>에서 김태희가 맡았던 ‘한여진’ 역을 소화하는 건 버거울 것이다. 드라마마다 요구하는 스타일이 다른 만큼, 혜리 같은 천방지축도, 김태희로 대변되는 진중한 연기자도 꼭 있어야 한다.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다는 아니라도 정치인 중 일부는 혜리처럼 좌충우돌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줘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려 보자. 5공비리를 다룬 청문회 때 모르쇠로 일관한 전직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졌고, 3당합당이란 폭거가 자행될 때는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와 절연했다. 번번이 지면서도 지역주의에 맞서 싸웠고, 그래서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얻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검사와의 대화 때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고 한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했다.
이런 그를 보수세력은 품위가 없다며 비판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재임 기간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가 많은 매력을 지닌 정치인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가 ‘노사모’라는, 정치인 최초의 팬클럽을 거느린 것도 그 덕분이다.
노 전 대통령 이후 혜리형 정치인을 보는 건 힘들어졌다. 새누리당을 보자. 명백한 불의가 자행돼도 다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게 아예 체질이 됐다. 당 원내대표였던 유승민은 국회의 권위를 지키려다 대통령에게 야단을 맞자 90도로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당 대표 김무성은 납작 엎드리는 것도 모자라 대통령에게 아부를 해댄다. “이렇게 개혁적인 대통령은 앞으로 만나기 힘들 것이다”라니, 이렇게까지 해서 대표직을 유지해야 하는지 한숨이 나온다. 혜리형 정치인이 없는 건 야당도 마찬가지다. 차기 대선주자로 유력한 문재인을 보자.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낼 당시 부인을 백화점에 못 가게 하고, 청탁을 안 받으려 친구도 일절 만나지 않는 등 자기관리가 뛰어난 점은 십분 인정하지만, 그 이외에 어떤 매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안철수는 어떨까? 입대 전날까지 백신을 만드느라 바빠 가족들에게 군대 간다고 말도 안한 채 입대했을 만큼 자기관리의 화신인데, 너무 말을 아끼느라 침묵으로 일관하는 게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럼 지금 정치판엔 혜리형 정치인이 없는 것일까. 혜리형 정치인의 덕목이 ‘좌충우돌’이라면, 딱 한 분이 생각난다. 교과서 국정화로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자신의 일을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 유체이탈화법을 즐겨 쓰는 데다, 바람같이 사라졌다 7시간 만에 나타나는 분, 이 정도라면 혜리형이 되기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차이는 있다. 혜리의 좌충우돌은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반면, 이분의 좌충우돌은 주변을 어둡게 한다는 것. 아무렴 어떻겠는가? 있으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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