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이해인시집(작은기쁨)

어느 노인의 편지

튼씩이 2019. 7. 1. 08:28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들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는

친절한 친구들이시여

나를 마다 않고 살펴주는 정성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해요

 

허지만 그대들이 나를

자꾸만 치매노인 취급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교육시켜려 할 적마다

마음 한구석에선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냥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없어진 것뿐인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본다오

제발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나를 갓난아기 취급하는

언행은 좀 안 했으면 합니다

 

 

아직은 귀가 밝아 다 듣고 있는데

공적으로 망신을 줄 적엔

정말 울고 싶답니다

그리고 물론

악의 없는 질문임을 나도 알지만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지 없는지

은근슬쩍 떠보는 듯한 그런 질문은

삼가주면 좋겠구려

어려운 시험을 당하는 것 같아

내 맘이 편칠 않으니……

 

어차피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고 떠나갈 나에게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느냐

아직도 살고 싶으냐

빙빙 돌려 물어본다면

내가 무어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더 살고 싶다고 하면

욕심 많은 늙은이라 할 테고

어서 죽고 싶다면

우울하고 궁상맞은 푸념쟁이라고 할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나의 숨은 비애를

살짝 감추고 사는 지혜가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이기적인 추한 모습

생에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아주 조금만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하늘이 준

복과 수를 다 누리라 축원하고

오래 살라 덕담하면

좋다고 고맙다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나도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달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달라고

오늘은 내 입으로

꼭 한 번 말하고 싶었다오

 

그러니 부디 지상에서의

나의 떠남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좀 더 기다려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나를 짐이 아닌 축복으로

여겨달란 말은 않을 테니

시간 속의 섭리에 맡겨두고

조금 더 인내해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뜻으로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어설픈 편지라도 쓸 수 있으니

쓸쓸한 중에도 행복하네요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나의 처지에

오늘도 미안한 마음 감출 수가 없지만

아직은 이렇게 살아 있음이

그래서 행복해서

가만히 혼자 웃어봅니다

이 웃음을 또 치매라고 하진 않을까

걱정되지만 그래도 웃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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