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1443년 12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많은 책을 훈민정음으로 펴냈다. 특히 의서ㆍ농서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책과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한 교훈서 등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백성ㆍ국민을 위하고자 하는 정책에는 기득권 세력의 거센 도전이 따른다. 당시 최만리 등 조정의 중신들과 각지의 유생들이 드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의 예에 어긋나며,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는 나라는 오랑캐들뿐’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군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였지만 지배층에서는 19세기까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비하하고, 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글로 치부하였다. 말(언어)은 한국어로 하면서 글(씨)은 한문으로 쓰는 실정이었다. 양반 지배층은 여전히 한문(한자)을 자신들의 ‘모국어’로 상용하면서 글이 백성들과 공유되는 것을 저지하였다.
훈민정음(한글)을 향한 가해자들이 많았지만 이를 지키고 연구하고 다듬어 온 분들도 적지 않았다. 문자 창제 초기부터 수백 년 동안 언문으로 천시되어 온 훈민정음을 ‘한글’로 이름 짓고 짧은 생애를 한글 보급과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에 바친 한힌샘 주시경(1876~1914)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시경학보(사진 제공: 김삼웅)
주시경의 어릴 적 이름은 주상호(周相鎬)였는데 나중에 시경(時經)이라 고치고 아호를 한힌샘(白泉)이라 지었다. 시경이란 때때로 경전을 읽는다는, 즉, 글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한힌샘은 결코 마르지 않는 깨끗한 샘물을 의미한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너무 어질어서 울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아 안순(安順)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시경이 열세 살(1883년) 되던 해 봄에 서울에서 큰아버지 학만(鶴萬) 씨가 시골 댁에 와서 형제분이 의논하였고, 그 결과 주시경을 양자로 정하여 서울로 데리고 올라오게 되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894년 9월에 주시경은 머리를 깎고 서울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몸과 머리털이나 살은 부모가 나에게 주신 것이므로 이것을 다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던 당시, 단발은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주시경은 언제부터 한글에 그토록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을까. 그는 왜 시대 조류와는 다른 길을 걸었을까, 그리고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주시경은 배재학당에서 박세양·정인덕 강사에게 서양식 교육으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수학·영어·시사·내외지리(內外地理)·역사 등의 신학문을 배웠다. 학구열이 남달랐던 주시경은 부족한 학비를 벌기 위해 배재학당 인쇄소에서 잡역을 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남대문로 상동의 작은 초가에서 한글 연구에 열중하였다.
그는 중추원 고문관 겸 『독립신문』 사장이었던 서재필에게 만국지지를 배우면서 그와 인연을 맺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보통과에서 당대의 개화파 거물 서재필과 만나고, 훗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면서 한글 연구라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주시경은 서재필의 권유를 따라 회계 겸 교보원(오늘의 교정원)으로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창간호가 1896년 4월 7일에 발행되었다. 비록 4쪽짜리 초라한 지면이었으나 그 의미와 반향은 적지 않았다. 여기에 실린 ‘창간사’는 일개 신문의 고고지성을 뛰어넘어 조선 사회에 큰 울림으로 메아리쳤다. 그리고 이 신문이 순 한글로 낼 수 있었던 것은 주시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립신문』이 창간되고 7월에 독립협회가 설립되었으며, 1898년 3월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2년여 동안은 개화의 전성기였으며 한글 운동을 중심으로 가히 르네상스라 할 만했다. 주시경은 고작 20대 초반 학생 신분으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서 개화파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런데 서재필이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떠나면서 주시경은 윤치호와 함께 『독립신문』을 함께 맡아 운영하였다. 고종이 적대시하고, 열강의 이권 탈취를 매섭게 비판해 온 까닭에 러시아ㆍ청국ㆍ일본 등 외세가 사갈시하는 『독립신문』의 운영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 관변단체로 세력을 키워 온 황국협회와 보부상 무리의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간부들을 향한 테러와 협박이 잦아졌다. 주시경에게는 혹독한 시련기였다. 주시경이 배재학당 재학 중 수행한 또 다른 큰 역할은 협성회와 『협성회보』 발간에 찬술원(편집위원) 으로 참여한 일이다. 서재필의 지도로 이승만·전덕기 등과 함께 조직한 협성회는 처음에는 학생 단체였으나 곧 일반인들도 참여하였다. 협성회는 뒷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원형이 되었다. 회의 용어 ‘동의’, ‘재청’, ‘개의’ 등이 이때 처음으로 쓰이고, 박수치는 법도 이때에 생긴 것이다. 서른 살(1900년)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한 그는 당대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인 전덕기 목사가 있던 상동교회 청년학원 국어강습소에 국어문법과를 개설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때의 강의록을 추려 서른한 살 때 『대한국어문법』을 출판하였다.
교육자로서 그는 청년학원·공옥학교·서우학교·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명신여학교) 등에서 교사를 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학교·융희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보성중학교·사범강습소·배제학당등에서 강사를 지냈다. 주시경은 나라가 기울던 1905년,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1907년 정부 내 학부(學部)의 국어연구소 위원으로 들어가, 나라가 망해도 국어만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하였다. 또 국치의 해인 1910년 『국어문법』을 지었고, 최남선이 창설한 광문회에서 간행되는 국어 관계 서적의 교정과 『말모이』(국어사전)의 편찬 책임을 맡았다.
한말과 일제 강점 초기에 한글 연구와 우리글 지키기에 온 힘을 쏟고 최현배·김두봉·권덕규·염상섭·변영태·현상윤·신명균·이규영·장지영·이병기 등 훗날 국어 연구의 큰 별이 된 제자들을 키워, 광복 후 남북한에서 한글 운동의 선두주자로 만들었다. 광복 후 미군정이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려 할 때 이를 막아내고, 남과 북에서 한글 전용 정책을 이끈 것도 한힌샘의 제자들이었다.
▲한힌샘 주시경의 동상(사진 제공: 한글학회)
주시경은 1914년 국내의 독립운동 동지들이 구속되자 해외 망명을 준비하던 중 급환으로 서른아홉 살에 별세하였다. 한힌샘은 어느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애국자이고 ‘한글’이란 이름을 창안한, 그래서 세종대왕의 후계자라 하겠다. 한데 지금 그의 업적과 해적이를 아는 이 얼마나 될까. 한말 격변기부터 일제 강점 초기 민족 수난의 시대에 언론인·계몽운동가·교육자·국어학자로서 ‘한글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주시경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있었기에 한글·국어가 지켜질 수 있었고 널리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다.
글: 김삼웅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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