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의 어릿광대’
『국문강의』(1906)의 발문에서 주시경은 “나는 다만 국문의 한 어릿광대 노릇이나 하려는 것이니, 고명하신 분들이 앞으로 말과 글을 연구하고 수정하여 좋은 도구로 만들어주시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랬다. 그가 바랐던 것은 그저 ‘국문의 어릿광대’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국문’, ‘고명하신 분들’에게는 더욱 더 외면당하던 ‘국문’이 자신의 어릿광대짓으로나마 그분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면, 그리하여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자신은 족하다는 것이었다. ‘국문의 어릿광대 노릇이나 하겠다’는 주시경의 말은 그러나 그저 겸손의 표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아마 당시에 그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국어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아는 주시경은 그 ‘어릿광대 노릇’과 더불어 비로소 태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경계와 ‘본음, 원체’
배재학당 학생이던 주시경은 1897년 『독립신문』에 두 편의 ‘국문론’을 싣는다. 첫 번째 ‘국문론’이 ‘왜 국문을 써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글은 ‘그 국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첫 번째 글은 그가 국문을 써야 하는 이유를 (민족주의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생활 습속의 형성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 글에서 그는 국문을 옳게 쓰고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여기서 문법을 제대로 알고 글을 쓴다는 것을 그는 말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컨대 사물의 이름을 대신하여 일컫는 ‘이것’과 여기에 붙는 토 ‘이’를 합쳐서 ‘이거시’라고 적는다면 두 말의 경계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 것이므로 ‘이것이’라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문법’에 대한 대단히 소박한 이해이다. 그러나 이 별로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생각이 바로 그의 이른바 분석주의 이론과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이었던 그의 표기 이론의 출발점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을 맡아 보다’의 ‘맡아’를 주시경 당대에는 ‘맛하’로 적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맛하’가 아니라 ‘맡아’로 적어야 말의 ‘원체, 본음, 법식’에 맞다고 했는데, ‘맛하’가 동사의 어간(‘맡-’)과 어미(‘-아’)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은 것이라면 ‘맡아’는 이들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획된 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래의 형태’, ‘본래의 소리’를 적어야 ‘법식, 문법’에 맞다는 것이 말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맡는, 맡지, 맡아’를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만는, 맏찌, 마타’가 되는데, 이와 같이 어떤 말과 어울리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지는 현실적인 소리가 아니라, 달라지기 전의 본래의 소리, 원래의 형태를 밝혀 적자는 것이 주시경식 표기 이론의 핵심이다. ‘국문’은 ‘국어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사진처럼 반영해야 한다고 본 주시경에게 ‘국어의 소리’는 따라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귀에 들리는 소리였다기보다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소리였던 것이다. ‘맡고, 맡는’의 ‘맡’은 어느 누구도 발음할 수 없고, 또 그래서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소리가 아닌가.
들리지 않는 소리와 ‘국어문법’의 구상
우리가 아는 ‘국어 교사’, ‘한글 학자’로서의 주시경의 모습은 대체로 1905년 이후의 주시경이다. 바로 이때부터 그는 서울의 각급 학교에서 국문과 국어를 가르쳤고, 1907년부터는 국문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국어강습소를 운영하여 그 졸업생들과 함께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 시기 주시경은 지석영을 비롯한 윗세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전통 문헌들을 접할 수 있었고, 또한 자신보다 아래의 젊은 세대들과 강습소를 운영하고 단체 활동을 해 나가며 자신의 ‘국어문법’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전자의 결실은 각종의 전통 문헌을 토대로 하여 우리말의 소리를 정리한 『국어문전음학』(1908)이고 후자의 성과는 ‘짬듬갈’과 ‘기난갈’을 통해 우리말의 문법을 정리한 『국어문법』(1910)이다. 그리고 이 둘은 표기의 문제를 통해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국어문법』(사진 출처: 한글학회)
주시경은 지석영을 통해 얻어 본 『훈민정음』 예의의 ‘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이라는 구절을 모든 초성을 종성에 쓸 수 있다는 규정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표기 이론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성에 쓸 수 있는 글자를 8자로 제한한 『훈몽자회』를 국문을 망친 주범이라고 보았다. ‘百年’을 ‘임시의 음’인 ‘뱅년’으로 적지 않고 본래의 소리인 ‘백년’으로 적듯, 귀에 들리는 소리인 ‘낟’이 아니라 본음인 ‘낫, 낮, 낯, 낱’으로 구별해서 적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초성을 종성에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시경의 주장이었다. ‘낫, 낮, 낯, 낱’과 같은 것들은 아무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오직 글로 써서 눈으로만 구분할 수 있는 소리이다. 주시경은 이런 것들을 ‘본음’이라고 보았고 귀에는 들리지 않는 ‘본음’을 세심히 구별해 내는 작업이 우리를 ‘국어문법의 사상’으로 인도한다고 했다.
‘국어문법’이 실제 발화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변이와 변종에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시경이 발견한 추상적 층위의 소리는 실제 발화에서 발견되는 그 수많은 변이와 변종 저 너머에 있는 ‘국어문법’을 구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 ‘국어문법의 사상’을 김두봉, 최현배 같은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열심히도 일궈 나갔다.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와 같은 발언을 통해 이른바 어문민족주의자의 면모를 확연히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이다. 이런 모습은 1910년 무렵 제자들과 함께 대종교로 개종했다는 증언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말모이』 원고(1911년 경)(사진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남북에 흩어진 주시경의 유산
주시경이 말년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은 물론 『말모이』이라는 이름의 조선어사전 편찬이었다. 조선광문회의 야심찬 기획이었으나 1914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끝내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현재 남아 있는 일부 원고들을 보면 주시경이 이 사전에서 선보이고자 했던 그의 문법 체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의 문법보다 훨씬 더 혁신적이었던 것 같다. 사전 작업을 함께 했던 그의 수제자 김두봉이 펴낸 『조선말본』마저 주시경의 최종 문법은 담아내지는 못했고, 최현배가 넘어섰다고 생각한 스승의 문법은 1910년의 『국어문법』일 뿐이었다.
주시경의 사후 그의 제자들은 대체로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주시경의 뒤를 따라 전통적 표기 방식의 혁신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들은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을 발표했고, 이제 애초의 목적이었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이 사전 편찬 작업은 또 다시 무산된다. 해방 이후 주시경의 제자들은 남과 북으로 흩어지고, 한국어/조선어 연구의 주된 흐름은 차츰 서양의 ‘선진’ 이론을 직접 공부한 그 아랫세대가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표기법의 면에서는 주시경과 조선어학회의 기초 작업이 탄탄했던 덕택에 남북의 이질화를 이만큼이나마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한눈에 보기에도 남북의 출판물에는 서로 다른 표기 규범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차이를 가장 도드라지게 하는 것은 역시 두음법칙에 관한 것이다. 남쪽은 ‘ㄹ’이 낱말의 첫소리에 오면 ‘ㄴ’으로 바뀌어 소리 나므로 ‘근로’의 ‘로(勞)’를 ‘노동’에서는 ‘노’로 적는다. 그러나 북쪽은 ‘勞’의 본음이 ‘로’이므로 말의 첫소리에 오든 그렇지 않든 ‘근로, 로동’과 같이 모두 그 본래의 음을 적어 주어야 한다고 본다. 마치 ‘국가’의 ‘국(國)’이 ‘국민’에서는 ‘궁’으로 소리 나지만 소리 나는 대로 적지 않고 본음인 ‘국’으로만 적듯이.
북쪽의 이런 주장은 물론 본음, 원체, 법식에 맞게 적어야 한다는 주시경식 표기 이론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다만, 현실적인 소리와 관계없이 원래 형태를 밝혀 적자는 것이 주시경의 주장이었던 데 비해, 북쪽에서는 아예 현실 발음까지 바꿔 버렸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언어의 발전’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막 천명한 ‘사회주의 북한’이라는 맥락을 떠나서 이 규정의 성립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언어 이질화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는 북쪽의 두음법칙 관련 규범이 주시경 및 조선어학회가 정립한 표기법의 근본 원칙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은 남북 언어 통합 시대의 새로운 언어 규범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아닌가 한다.
오늘 다시 주시경을 읽는다는 것
‘국어문법’이란 ‘국어’를 말하는 모든 화자들이 공유하는 문법을 뜻할 것이다. 주시경이 살았던 당대의 시대적 과제가 바로 계급적 지역적 차이를 뛰어넘는 균질적인 국민 의식의 창출이었다면 그가 구상한 ‘국어문법’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학문적 응답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대적 과제가 ‘국어문법’으로 상징되는 균질적이고 획일적인 국가 의식의 환기에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다양한 계층과 지역, 세대의 차이가 모자이크처럼 반짝이게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제도와 담론의 모색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주시경을 곱씹어 보는 것 역시 그의 삶과 학문을 오늘에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시대에 충실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의 시대에 진지하게 응답하기 위해서일 테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가 이룬 성과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바로 그 근대의 모순과 문제를 넘어서는 지혜가 필요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시경이 ‘어릿광대’를 자처하며 가졌던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 아닐까.
글: 김병문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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