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지다
국문 연구, 말모이 편찬, 한글 강습 등으로 불철주야 장안을 누비던 주시경이 1914년 7월 27일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제자 김윤경은 주시경 선생은 1911년 일제가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사건의 여파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망명을 결심하고, 방학 때에 고향 부모를 찾아뵈었으며, 서울로 돌아와 떠날 준비를 하던 중에 ‘체증’으로 돌아가셨다고 썼다(김윤경, 「주시경 선생 전기」, 『한글』 126(1960)).
돌연한 스승의 죽음에 제자들은 통곡했다. 김두봉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라며 슬퍼했고, 스승의 부탁으로 동래군 동명학교 하기강습회에서 수업을 하던 중 부음을 들은 최현배는 강습생들과 함께 대성통곡했다. 생전의 주시경은 상동청년학원을 비롯해 공옥학교, 서우, 이화, 명신, 흥화, 기호, 숙명, 진명, 휘문, 보성, 중앙, 융희, 사립 사범강습소, 배재, 서북, 협성, 경신, 영창, 외국인 한어연구소 등을 오가며 일주일에 40시간에 이르는 강의를 소화했다.
▲한힌샘 주시경 선생(사진 출처: 한글학회)
두 눈을 부릅뜨고 거품을 날리며 겨레의 혼과 나아갈 길을 역설하며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지금 청소년들은 과연 강의실에서 이러한 스승을 만날 수 있을까? 주시경은 언어와 민족을 운명공동체로 생각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청년들에게 지식을 전하고 겨레의 혼을 불어넣어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주시경은 전사와 같은 심경으로 교단에 섰다. 국어연구ㆍ강의ㆍ저술만으로도 24시간이 부족했지만, 그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었다. 바로 조선어 사전을 만드는 것이었다.
주시경은 1897년 4월과 9월 독립신문에 게재한 「국문론」이란 논설을 통해 한자 폐지와 국문 전용을 제안하면서 ‘옥편을 만들고 문법을 정리하고 철자법을 통일할 것, 국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횡서할 것’을 주장했다. 사전(=옥편)을 만들어야 조선어가 과학적 체계를 가진 언어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전 편찬은 간단하지 않았다. 1910년 10월에야 최남선이 창설한 조선광문회와 인연을 맺으면서 제자 김두봉ㆍ권덕규ㆍ이규영 등과 함께 ‘말모이’ 편찬을 시작할 수 있었다.
주시경 서거 후 김두봉,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등이 스승을 대신해 출강했다. 스승의 빈자리를 채우고 위기에 처한 조선어 교육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김두봉은 보성, 휘문 등에 출강하면서 스승이 완성하지 못한 ‘조선말글본’의 연구를 계속해 『조선말본』(1916)을 저술했다. 그러나 주시경 사후 말모이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고, 최남선이 계명구락부를 결성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김두봉은 일경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0년에는 이규영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말모이 편찬은 난파선처럼 표류했다.
제자들이 말모이 깃발을 올리다
▲잡지 『한글』제5권 제1호 외 36권(사진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1929년 10월 31일 오후 7시 조선교육협회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식에서 사회 각계 인사 108인이 참여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김활란, 박승빈, 박희도, 방정환, 송진우, 안재홍, 양주동, 유억겸, 유진태, 윤치호 등 당시 민족운동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참여했지만, 중심은 조선어연구회의 권덕규, 김윤경, 신명균, 이병기, 이상춘, 이윤재, 정열모, 장지영, 최현배 등 주시경의 제자들이었다.
김두봉은 108인에 이름을 올렸지만, 상하이의 인성학교에서 교장을 맡고 있었기에, 실제 활동은 불가했다. 그런데 108인 중 흥미로운 인물이 있다. 경남 의령 출신의 이극로는 고학으로 상해 동제대학을 다녔고, 독일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학(지금의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으며, 1927년 5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9년 귀국한 이극로는 조선어연구회를 찾아가 회원이 되었고, 타고난 도전 정신과 추진력으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경제학을 전공한 이극로가 왜 조선어연구회를 찾아갔을까?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난 이극로는 서간도 동창학교에서 주시경의 제자 김진에게서 한글 공부의 기회를 얻었고, 상해에서 만난 김두봉을 통해 주시경의 학설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극로는 주시경을 만난 적도 없지만, 김두봉을 통해 주시경 문하에 들어갔으며, 어문민족주의자로서 사전 편찬을 시급한 민족적 과제로 생각했고, 어문운동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민족혁명의 기초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주시경의 제자들은 언어를 단순히 의사 표현의 수단이 아닌 생각과 정신을 담는 그릇, 민족의 생명줄로 파악했고, 이런 생각은 이은상이 작성한 사전 편찬 취지서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들에게 사전은 단지 말의 의미를 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취지서에 담긴 ‘낙오-갱생-첩경-사전 편찬’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사전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1919년 3.1 독립선언서와 조금도 다를 바 없고, 사전편찬회에 참여한 발기인의 숫자와 면면을 통해서, 사전 편찬이 조선 민족의 독립을 갈망한 민족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모으는 것이 사전 만들기의 첫걸음이지만, 설명을 위해서는 어문의 정리와 통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1930년 12월 13일 조선어연구회 임시총회에서 ‘조선어철자 통일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31년 1월 24일 ‘외래어 표기법 및 부수 문제 협의회’를 열어 모든 문제를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에서 이름 바꿈)가 담당하게 되었으며, 1934년 12월 2일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회’를 구성했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조선어를 비로소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체계를 갖는 근대적인 언어로 정비하는 대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 『한글 마춤법 통일안』(사진 출처: 한글학회)
첫 성과는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 발표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었다. 1930년 12월 13일부터 1933년 10월 19일까지 136차례의 독회를 열었고, 소요된 시간은 442시간 40분이었으며, 권덕규, 김윤경, 박현식, 신명균, 이병기, 이희승, 이윤재, 장지영, 정인섭, 최현배, 정열모, 이극로, 이만규, 이세정, 이상춘, 이탁, 이갑, 김선기 등 18명의 제정위원 중 대다수가 주시경의 제자였다.
1933년 10월 29일 ‘통일안’을 발표했을 때, 동아일보는 조선 문화사상 잊지 못할 날이며 영원히 기억해야 할 날이라며 우리 겨레 최초의 철자법이 완벽한 것일 수는 없겠지만 어문생활의 기초가 되는 겨레말의 표기법이 마련됨으로써 비로소 말글살이의 합리적 처리가 가능해졌다고 상찬했다. 현행 ‘한글맞춤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통일안’이 주시경의 형태주의 문법을 바탕으로 제정되었다는 것은, 제자들이 그의 학설을 잇고 발전시키고 정립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제정하고,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함으로써 근대적 체계를 갖춘 민족어 3대 규범이 완성되었고,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사업 시작 11년 만인 1940년 3월 총독부로부터 사전 편찬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국어 상용(일본어 상용)’을 기치로 조선어 말살을 본격화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회원들과 후원자 등 관련자를 모두 검거함으로써 사전 편찬은 중지되었고, 주시경의 꿈도 좌절했다.
검거된 조선어학회는 불법적인 구금, 구타, 고문 등으로 고통받았고, 이윤재와 한징은 지옥 같은 옥살이를 견디지 못해 차디찬 형무소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전을 만드는 것, 조선어를 연구하는 것이 심모원려를 품은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총독부 사법부의 판단이었으니, 일제가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했다’기보다는 ‘조선어학회 활동의 본의를 정확히 꿰뚫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스승의 꿈을 이루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조선어학회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출옥했다. 8월 19일 서울로 귀환한 조선어학회는 이튿날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첫 한글 교과서 『한글 첫 걸음』을 편찬했고, 말살 위기에 몰렸던 민족어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전개했으며, 문맹 퇴치와 교사 재교육을 위한 한글 강습, 잡지 『한글』 발행, 한글 전용 운동, 사전 편찬 등을 힘차게 추진했다.
광복이 되었지만, 사전 편찬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1957년에야 전 6권으로 『큰사전』을 완성할 수 있었다. 28년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전용 운동은 주시경의 국문 전용의 뜻을 계승한 것이었고, 1948년 ‘한글전용법’ 제정을 이끌어 냈다. 문자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문자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한글 전용의 기치를 들었으나, 한자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990년대까지도 대부분의 신문이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되었지만, 21세기 들어서면서 한자는 자취를 감추었고, 한글 시대가 열렸다.
1914년 주시경은 39세를 일기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꿈은 제자들에게 이어졌고, 제자들은 35년간의 식민지하에서도, 광복 후 새 사회 건설의 격랑 속에서도 스승의 가르침과 꿈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최현배는 주시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문법서 『우리말본』(1937)을 완성했고, 주시경 사후 41년이 되는 해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 정재환 (역사학자,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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