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사건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재판 지연은 ‘양승태 코트 사법농단’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2012년 대법원에서 역사적인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2013년 일본 전범기업의 재상고가 접수된 뒤 2018년 확정 판결이 나오기까지 사건이 5년간 대법원에 묶여 있는 사이 원고 9명 중 8명이 숨졌다. 베일이 벗겨진 순간 적나라한 내막이 드러났다. 법원행정처에서 판사들이 법관의 양심을 저버린 채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건들을 만드는 사이 행정처 간부들과 청와대, 정부 사이에는 은밀한 만남과 전화통화들이 이어졌다. 그 결과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돼 재판을 받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법원에는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베테랑 기자 권석천의 책 『두 얼굴의 법원: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는 ‘사법농단’에 대한 최초의 심층 기록이다. 부당한 지시에 저항해 사표를 냄으로써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베일을 벗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탄희 전 판사와의 심층 인터뷰를 시작으로 오랜 법조기자 생활에서 만났던 다양한 취재원의 증언을 듣고, 법정에서의 재판을 취재하고, 방대한 관련 자료를 검토했다. 그 작업들을 통해 사건이 처음 불거졌던 당시의 상황과 세 차례에 걸친 대법원의 자체 조사, 검찰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충실하고도 입체적으로 담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읽다보면 판사 이탄희가 왜 두 번 사표를 내야 했는지 알게 되는 동시에 한국 법원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7장의 강제징용 재판 사례는 한일 간의 마찰 차원을 넘어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법농단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사법농단’이 단지 양승태 코트 몇몇 인물들의 일탈이 아니라 대법원장 중심의 법원 시스템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될 수밖에 없는 조직논리에서 비롯됐음을 설득력 있게 증명해낸다. 나아가 조직의 존재 이유인 공적 가치를 배신하고 조직원들―구체적으론 고위조직원―의 사사로운 이익에 충성하는 조직논리가 세월호참사부터 각종 부정부패 사건, 박근혜정부 국정농단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경고한다. ‘사법농단’이라는 사건 앞에 서 있는 지금이 한국사회의 중요한 갈림길이라는 것이다. 바닥으로 추락한 법원의 신뢰를 회복하고 주권자인 시민을 위한 재판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사회가 조직논리를 넘어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소중한 키워드들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yes24 책소개에서 -
양승태 대법원장의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위해 ‘말씀자료’를 작성했던 서진국 전 기획1심의관이 동료 심의관에게 보낸 이메일엔 ‘VIP(대통령)에게 던져줄 보고서’라는 글귀가 있었다. 또 박상언 전 기획조정심의관은 말씀자료 관련 이메일에 ‘할매(박 대통령)의 불신 원인은 정말 소설입니다’라고 적었다. - 93쪽 -
‘문제는 한국의 보수가 안보와 성장, 즉 북한과 돈 외에는 세상을 보는 다른 프레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죠.’
‘안보’를 다른 말로 하면 ‘생존’이다. 생존과 성장 말고는 다른 어떤 비전도 갖기 힘들었던 건 보수 정치만이 아니다. 한국의 조직들이 대개 그러했다. 시장에서 가치든, 뭐든 내다팔며 생존했고, 성장했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이 ‘시장 법원’ ‘시장 검찰’ ‘시장 정부’ ‘시장 언론’이다.
(중략)
이들의 조직 논리는 이미 국민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엘리트들은 평생 자기 조직에만 갇혀 살았고, 그 밖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서로 엘리트로 인정해주고 자기들끼리 보상해주며 살았다. 조직 논리를 흔드는 외부 침입이 감지되면 똘똘 뭉쳐 조직을 보호했다. 지극히 편협한 조직 논리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들만이 절대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양 큰소리친다. - 391쪽 -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한 진실에 다가가면서 답답해져오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에게 던져줄 보고서를 만들고, 대통령을 할매라 부르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라 부르는 판사들, 그 판사들 중에서도 잘 나가는 사람들이 간다는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하는 자들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조직논리에 적응하면서 조직을 지키는게 인간의 본연이자 속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국민의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거 아닌가.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재판(그 재판도 전화 한 통에 결론이 바뀌는지,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을 통해 죄를 물으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반성도 없고 그 대가도 치루지 않으면서 그 자리를 지키는건 비겁한 자세라 보여진다. 물론 법원행정처가 아닌 일선에서 국민을 위해 노력하는 판사들이 많기 때문에 그나마도 사법부가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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