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도 그렇지만, 영어의 말뿌리(어원)를 알면 그 낱말의 뜻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영어 ‘culture’를 받아들이면서 한자권에서는 ‘문화(文化)’라고 번역했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행동 양식 등을 문화라고 쓴 것이다. ‘농업’이라고 번역하는 ‘agriculture’의 말뿌리는 땅에서(agri)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일(culture)에서 왔다. 예전에는 모여 사는 집단 사이에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 농사짓는 방식과 저 동네에서 농사짓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그렇게 서로 다른 농사짓는 방식이 바로 영어로 ‘agriculture’이다.
‘culture’를 받아들이면서 ‘문화’라는 멋없는 낱말 말고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agriculture’는 ‘농업(農業)’이 아니라 ‘먹거리 만들기’로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때늦은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역사에 가정은 없다. 이미 늦었다. 굳을 대로 굳어버린 이 말을 바꿀 수는 없다. 쓰임새가 굳어버리기 전에 고민했어야 했다. 그런 노력을 농업 분야의 용어를 정하는 데에 쏟은 예를 소개하련다.
그림 1. 자연과 인간
우리나라에는 5,000개가 넘는 법이 있다. 대부분 법은 국가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일정 부분 제한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법은, 무엇보다, 권리를 제한받는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쉽게 받아들여야 법을 만든 취지가 퇴색되지 않을 것이고, 국민들의 수용성도 높아진다. 2021년 3월 25일에 ‘치유농업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은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이 아니라,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법이다. 그 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말과 외국어/외래어 문제를 고민해볼 시간이 있었다.
그림 2. 숲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출처: 서울특별시 소방본부)
웰빙(well-being)이라는 영어 낱말이 있다. 우리가 누리는 산업 고도화는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 반면, 정신적 여유와 안정을 앗아간 면도 적지 않다. 현대사회는 구조적으로 사람들에게 물질적 부를 강요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 따라서 물질적 부에 견줘 정신 건강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산업사회의 병폐를 인식하고,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나타난 새로운 삶의 문화 또는 그런 양식이 웰빙이다.
힐링(healing)이라는 영어 낱말도 있다. 치유하다, 낫다는 뜻을 지닌 ‘힐(heal)’의 명사형으로 10년쯤 전에 언론에 소개되었다. 그전에는 뜻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유행처럼 번진 2010년대부터 흔하게 쓰고 있다. 힐링이 막 퍼지기 시작할 무렵, 비판도 같이 나왔다. 힐링이 여러 문제에 직면한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고 정신적 안정을 되찾게 함으로써 다시 생활을 지속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현실에서 당면한 여러 물질적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는 점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즉 희망 고문만 한다는 거다. 또,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힐링이라는 단어는 현실 도피로 바꿔도 전혀 내용상 모순점이 없을 정도로 잘못 쓰고 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힐링 열풍은 고통받고 있는 청년들의 아픔을 듣기 좋은 말로 슬쩍 덮어버린다는 비판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림 3. 농촌 체험학습에 참가한 어린이들
이 무렵,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농촌진흥청에서 농촌에 널려 있는 자원이나 이와 관련된 활동을 이용하여 국민의 신체, 정서, 심리, 인지 등의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산업을 찾아 나섰다. 농업을 응용하고 농촌에서 웰빙과 힐링을 함께할 방안을 찾는 법률을 만들고자 했는데, 웰빙과 힐링을 아우를 수 있는 낱말을 찾는 데서 막혔다. 물질적 풍요가 필요한 웰빙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힐링을 합친 낱말이 필요했다. 웰빙이나 힐링이라는 외국에서 온 말을 우리나라 법률 이름에 쓰는 것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새로운 낱말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현실적인 문제도 감안하여 대안으로 찾은 것이 ‘치유’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치유농업법에서 ‘치유농업’을 “국민의 건강 회복 및 유지·증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다양한 농업·농촌자원의 활용과 이와 관련한 활동을 통해 사회적 또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정의했다. 아쉽지만, 현실적으로, 국민이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쉽게 안내해주는 법 명칭이다.
치유농업과 일반 농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치유농업은 농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건강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농업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경쟁에 지친 도시민들이 농업·농촌에서 치유하는 도움을 얻으려는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에서 공익적인 치유 농원이나 원예치료 등의 효과성을 검증하고 치유 산업과 관련된 더욱 깊이 있는 정책적 지원 또한 필요한 상황이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외국과의 교류가 늘면서, 외국어가 우리 문화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럴 때, 외국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문화에 맞게 바꿔서 받아들이면 그 말을 쓰는 국민의 이해도가 높아진다. 우리말에 비행접시가 있다. ‘Unidentified Flying Object’의 약자인 ‘UFO’를 이르는 우리말이다. 유에프오를 ‘정체불명의 비행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넓적한 접시처럼 보이는 게 날아다닌다고 해서 ‘비행접시’로 ‘번역’하여 받아들였다. 이처럼, 우리네 삶과 이어진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서 받아들이면 가장 좋다. 새로운 낱말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어려우면, 외국어 단어가 아닌 우리말을 쓰면 된다. 웰빙이나 힐링을 대체할 낱말로 ‘치유’를 쓰는 게 그런 보기이다.
요즘 4차 산업 혁명 이야기를 하면서 에이아이(AI)나 빅데이터 따위 낱말을 많이 쓴다. 최근 들어서는 메타버스 이야기도 자주 한다. 이런 낱말이 우리네 삶에 똬리를 틀기 전에 우리 삶과 버무린 멋진 낱말로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 그게 바로 기성세대가 후세에게 해 줄 의무이다.
성제훈(농촌진흥청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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