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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터러시가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튼씩이 2022. 3. 14. 12:49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쓴 영화 <기생충>의 한 줄 평이다. 그리고 ‘명징’과 ‘직조’라는 단어를 두고 인터넷이 난리가 났다. 크게 두 입장으로 나뉘었다. 굳이 이렇게 어렵고 현학적인 단어를 써야 하느냐는 비판과, 이 정도 단어도 모른다니 충격이라는 반응이 서로 부딪혔다. 내 느낌은 후자에 가까웠다. 특히 두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놀랐다. 어느덧 나도 ‘꼰대’가 된 것이다. 어느 유튜브 방송에 출연한 이동진 평론가는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데 적합한 말은 한 가지밖에 없다.”라는 말까지 인용하면서, 명징과 직조라는 단어를 바꿀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쉬운 말을 써야 한다는 쪽과 정확한 말을 써야 한다는 쪽 사이 인식의 틈을 메우기 쉽지 않다. ‘리터러시’가 문제가 되는 이유다.

 

언제부터인가 리터러시(literacy)라는 말을 참 많이 쓰고 있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이 말의 원뜻은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다. 한국어로는 ‘문해력’이나 ‘독해력’, ‘이해력’ 같은 말로 옮길 수 있겠다. 여기서 파생되어 “특정 분야에 대한 역량이나 지식”을 뜻하기도 한다. 사전을 보니 리터러시보다 일리터리시(illiteracy), 즉 ‘비문해’라는 단어가 먼저 있었다. 리터러시라는 단어는 19세기 말에 등장해서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널리 쓰였단다. 구글이 제공하는 사용 빈도 자료를 보면 20세기 전반에도 별로 많이 쓰이지 않다가, 20세기 후반, 특히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사용 빈도가 많이 늘어난 단어다.

 

그림 1. 리터러시의 원뜻은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었다.

 

빈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용하는 맥락에도 변화가 있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50년대 이전까지 리터러시라는 말은 말 그대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라는 좁은 뜻으로 사용됐다. 1950년대부터 뜻이 넓어지면서 작가와 독자가 처한 사회나 문화와 분리할 수 없는, 복합적인 맥락들을 고려하는 게 중시되었다고 한다. 옥스퍼드 사전과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리터러시라는 단어는 19세기 말에 만들어져서 20세기 전반기까지는 문해력이라는 좁은 뜻으로만 쓰이다가, 20세기 후반 이후 뜻이 확장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쓰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리터러시라는 말이 홍수처럼 난만하다. 리터러시 홀로 쓰기보다는 앞에 다른 단어가 붙어서 함께 쓸 때가 훨씬 많다. 검색으로 대략 스물한 가지 용례를 찾았다. 얼추 성격이 비슷해 보이는 것들끼리 묶어서 나열해 본다. 미디어 리터러시, 뉴스 리터러시, 디지털 리터러시, 데이터 리터러시, 컴퓨터 리터러시, 에스엔에스(SNS) 리터러시, 메타버스 리터러시, 인공지능 리터러시, 문화적 리터러시, 이미지 리터러시, 콘텐츠 리터러시, 시네(영화) 리터러시, 게임 리터러시, 다문화 리터러시, 광고 리터러시, 금융 리터러시, 스포츠 리터러시, 피지컬 리터러시, 헬스 리터러시, 육상 지도 리터러시, 멀티 리터러시 등등.

 

여기서 리터러시라는 단어가 좁은 뜻의 문해력만 뜻하지는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주로 매체 환경의 급격한 변화, 컴퓨터와 통신, 인공지능 기술 등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새로이 요구되는 지식, 역량의 습득, 강화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리터러시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모두 현대인의 사회경제적 생활과 민주주의 운영에 필수적인 역량이다. 리터러시가 중요한 이유다.

 

 

그림 2. 매체 환경과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리터러시가 여러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

 

사례를 보자. 강준만의 저작 <대중문화의 겉과 속>을 보면 미디어 리터러시는 “수용자의 미디어 사용 능력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 미디어의 올바른 이용을 촉진하는 사회 운동을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1992년 미국의 싱크탱크인 애스펜연구소가 주최한 ‘미디어 리터러시 전미 지도자회의’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는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에 액세스(접근)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발신하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고 한다.

 

디지털 리터러시도 찾아본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디지털 리터러시는 “디지털 플랫폼의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면서 명확한 정보를 찾고, 평가하고, 조합하는 개인의 능력을 뜻한다.” 컴퓨터 활용 교육과 함께 등장한 용어지만, 인터넷 발달과 모바일 기기의 출현, 소셜 미디어의 확장에 따라 단순히 기기 사용법만이 아니라 정보를 다루고 가공하는 일까지 범위를 확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리터러시라는 말의 폭넓은 확장과 맥락을 고려하면 좁은 의미의 ‘문해력’이라는 단어로 옮기기 어렵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리터러시의 대상은 좁은 의미의 ‘독해’를 넘어선 다양한 역량을 포함하고 있다. 번역 없이 그대로 쓰는 이유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편의를 추구하는 선택의 결과 리터러시라는 말이 의도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는 데 있다. 리터러시라는 말 자체가 리터러시를 가로막는다. 리터러시가 가장 필요한 보통사람들에게 리터러시라는 말은 무척 낯설고 생소하기 때문이다.

 

문해력이라는 말이 번역어로서 충분하지 않다면 새로운 번역어를 고민하는 것이 책임 있는 전문가의 자세다. 예를 들어 영국 노동자계급의 일상 문화를 다룬 문화연구 분야의 고전인 리처드 호가트의 저작 《The Uses of Literacy》(1957)의 경우를 보자. 번역자 이규탁은 리터러시의 번역어로 교양을 선택하고, 책 제목을 <교양의 효용>으로 옮겼다. 여기서의 리터러시가 단순히 읽고 쓰는 능력을 넘어서, 대중소설, 신문, 잡지 등의 출판물과 방송, 음악, 영화 등과 같은 ‘교양으로서의 문화’를 읽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위키피디아가 알려주는 것처럼 리터러시가 좁은 의미에서 넓은 의미로 확장되던 20세기 중반의 변화를 포착한 책이고, 또 그에 맞는 번역어라 할 것이다.

 

교양이 리터러시의 가장 적합한 번역어라는 말이 아니다. 리터러시에 딱 맞는 한국어를 찾아내기 어렵다는 데도 공감할 수 있다. 보통명사가 아닌 한 번역에서 1대 1의 정확한 대응어를 찾는 건 원래 어렵다. ‘이해 능력’이든 ‘사용 역량’이든 다른 무엇이든 적어도 리터러시보다는 리터러시에 도움이 되는 번역어들이 있을 것이다. 리터러시 운운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리터러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형근(사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