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우(1906~1995)는 193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안과 병원(‘공 안과’)을 개원한 안과 의사이다. 그런데 그는 안과 의사로서는 특이하게도 6·25 전쟁 발발 직전이기도 한 1949년에 한글 타자기를 개발해 타자기 대중화를 실현했다. 기계나 공학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어쩌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하여 한글의 기계화에 기여하게 되었을까?
안과 의사, 한글에 눈뜨다
1930년대 당시에는 인기 종목인 내과나 외과를 제외하고 안과나 이비인후과가 독립된 병원으로 개설되거나 개인 병원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공병우는 우리나라 최초로 안과 전문 개인 병원을 개원했다. 모험과도 같은 일이었다. 개원 초, 찾아오는 환자가 적어 환자 한 명, 한 명을 귀하게 돌보던 중 병원에 한 신사가 치료를 받으러 왔다.
개업해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다. 어떤 점잖은 환자 한 분이 치료를 다 받고 난 뒤, 나에게 한글에 관한 말을 한참 동안 해 주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한마디로 간추리면 한글 사랑이 민족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듣는 희한한 말이었다. 한글이란 말조차 생소하게 들린 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분이 바로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극로 박사였다. 조선의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고 온갖 압박을 가해 오던 식민지하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민족적 의식이 고취된 말일 수밖에 없었다.
- 공병우,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 중 발췌
공병우는 이극로 박사를 만난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글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고백했다. 그는 ‘앞 못 보는 환자를 치료하는 안과 의사라는 자신이 사실 한글에 대해서는 눈 뜬 장님이었다’고 술회하며, “이(극로) 박사로 인해 나는 안과 병원 개원 초기에 정신적인 개안을 하게 된 셈이다.”라고 처음 한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생생하게 소개했다. 단 한 번의 운명 같은 만남은 한글 사랑으로 민족의 혼을 일깨우려는 이극로의 열정이 공병우에게도 옮겨 붙은 사건이었다. 그 후 일제가 일본식 성명 강요1) 명령을 내리자 공병우는 곧바로 우체국으로 가 ‘공병우 사망’이라는 전보를 고향에 띄우고 일본식 이름으로 된 호적에서 자신의 이름을 합법적으로 뺐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지 않고 지키며 해방을 맞이했다.
타자기로 옮겨 붙은 ‘한글 사랑’
1945년 해방 후 미군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온통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릴 때, 공병우는 조선어 학회의 권승욱을 찾아가 한글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는 일제하에서 일본어 교육만 받고 자란 탓에 우리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해방된 국민이라면 먼저 제 나라 글을 옳게 아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공병우는 그렇게 우리글을 배우며 한글이 얼마나 아름답고 과학적인 글자인지 깨닫게 된다.
그즈음 일본인 교수가 모두 빠져나간 경성 의학 전문학교(훗날 서울대학교에 병합)는 학교 재건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국 의학계의 중진 인사들은 자신이 몸담은 학교와 병원을 민족의 학교, 나라의 병원으로 키우고자 모여들었는데, 공병우는 안과 교수로 선임되었다. 그는 안과학 강의를 위해 해방 전 본인이 일본어로 썼던 저서 ≪소안과학≫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수들과 함께 글을 원고지에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서(淨書) 작업의 진도가 너무 늦자 공병우는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곧바로 시중에 나가 한글 타자기 두 대를 사 들고 들어왔는데, 하나는 재미 교포 이원익이, 다른 하나는 송기주가 개발한 것이었다. 두 타자기는 당시 미국에서 널리 사용하던 영문 타자기 자판의 로마자를 한글 자모로 대치하고, 받침을 입력하기 위한 글쇠를 추가한 것이었다. 두 제품 모두 한글 자모의 사용 빈도를 무시하고 적당히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어서 우리말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데다, 받침이 있는 글자와 다음 글자 사이에 불필요한 간격이 생기는 결함도 있었다. 따라서 조작이 불편하여 영문 타자기의 절반 정도밖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공병우는 당장 두 타자기를 분해했다. 우리말로 된 안과학 교재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엉뚱하게도 쓸 만한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겠다는 목표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한글의 과학성을 담은 공병우 타자기
공병우는 마치 해부를 하듯 타자기를 분해해 타자기의 기본 구조부터 익혔다. 기계의 구조를 파악한 후에는 한글의 구조에 대해 공부했다. 공병우는 로마자와 달리 받침이 있는 한글의 구조를 타자기에 적용할 방법을 찾지 못해 오랜 시간 방황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자판은 자음과 모음으로만 이루어진 ‘두벌식 자판’이다. 공병우도 처음에는 두벌식으로 타자기를 제작하려 했다. 그러나 받침이 있을 때마다 별도의 글쇠를 눌러야 하는 당시의 두벌식 자판이 비능률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세벌식 자판을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눠지는 한글의 원리를 타자기의 자음, 모음, 받침 글쇠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글자 하나하나가 옆으로 나열되는 영문 타자기와는 다른 입력 방식이 필요했다. 공병우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쌍초점 방식2)’을 개발해 한글의 구성 원리를 입력 방식에 고스란히 재현하는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해 냈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는 초성, 중성, 종성의 과학적인 배열로 우리말을 입력하기에 적절하였으며, 자판도 자주 쓰는 소리를 분석해 인체 공학적으로 배치한 덕에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쳐도 손가락에 부담이 덜 가는 타자기였다. 또한 옛글도 오늘날의 글처럼 자유롭게 입력할 수 있었다. 남다른 집념으로 탄생한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는 1950년에 일반에 보급되어 전쟁 중 군에도 납품되면서 한글 타자기로서는 최초로 대중화되었다.
한글 타자기 개발 이후, 공병우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타자기를 개발하고 한글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 자판 문제를 연구하는 등 평생을 한글과 한글 자판의 대중화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바로 세벌식 타자의 표준화였다. 공병우의 세벌식 구조는 그 편리함과 과학성에도 불구하고 글자체가 예쁘지 않고 거칠다는 이유로 표준 글자판 선정에서 탈락됐다. 그는 표준 규격 신청과 각종 소송에도 세벌식 표준화를 이루지 못하자, 미국 필라델피아에 공병우 글자판 연구소를 설립해 여든의 나이에 매킨토시 컴퓨터로 세벌식 한글 글자꼴을 개발하고 이찬진, 강태진, 안대혁 등 젊은 프로그래머들과 한글 세벌식 입력기를 만들었다. 공병우 작고 5년 후인 2000년, 공병우의 공한체3)가 우수 한글 글꼴상을 수상하여 그 심미성을 인정받았다. 이제 그가 만든 세벌식 자판의 과학성과 편리함도 인정받을 차례가 오지 않을까?
1)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일. 1940년에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실시하였으나, 광복 후 1946년 조선 성명 복구령에 따라 무효가 되었다. 전 용어는 창씨개명(創氏改名).
2) 초성과 중성은 움직글쇠, 종성은 안움직글쇠로 배당하고, 초점(활자가 일정한 곳에 찍히도록 유도하는 장치, 타이프가이드type guide)의 왼쪽에 또 하나의 초점을 만들어 받침의 활자를 왼쪽으로 유도하는 방식.
3) 공병우와 한재준이 함께 개발한 탈네모틀 본문용 한글꼴. 한글의 창제 원리와 정신을 바탕에 둔 세벌식 한글 타자기 활자체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 한글 글꼴의 미감을 현대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참고 자료
공병우,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대원사, 1989.
최경봉,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책과함께, 2008.
김석득, ≪외솔 최현배 학문과 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우리말을 배우자 > 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아 숨 쉬는 지역어 - 이용악 시 둘러보기 (0) | 2022.04.06 |
---|---|
한글 맞춤법 차례차례 알아보기 (0) | 2022.04.06 |
방언 말모이 '고구마' (0) | 2022.04.04 |
재미있는 우리 속담 - 놀란 토끼 벼랑바위 쳐다보듯 (0) | 2022.04.01 |
일상 속 오늘의 다듬은 말 - 트리트먼트, 헤어드라이어, 고데, 헤어스타일, 헤어밴드, 다크서클 (0) | 202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