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시계를 돌려 103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919년, 서울은 고종 황제의 장례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종교 지도자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이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거국적인 민족 운동 예정일은 3월 1일 오후 2시로 잡혔다.
당일 정오 무렵부터 학생 수천 명과 사람들이 탑골 공원에 모였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민족 대표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인즉 이들은 전날 급하게 집결지를 인근의 요릿집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비폭력저항’을 대원칙으로 삼았기에, 인파와 일제 헌병 간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불안으로 술렁였다. ‘혹시 민족 대표들이 잡혀갔나?’ ‘거사는 실패인가? 이대로 해산해야 할까?’
이때 한 청년이 팔각정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조심스레 낭독했다.
“조선 독립 선언서.” 떨리는 목소리는 점점 우렁차게 변했고 공약 3장에 이르러 청년은 울부짖듯 일갈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조선 독립 만세!”
그의 낭독이 끝나자 탑골 공원의 군중은 폭발하듯 만세를 외치며 종로 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마침내 삼일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청년은 황해도 해주에서 온 전도사 정재용이다. 숨 막히는 정적과 초조함, 긴장이 엇갈린 그때 품 안의 독립 선언서를 만지작댄 정재용이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누구에게도 밀명을 받지 않은 그가 팔각정에 뛰어 올라 자발적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것은 삼임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위대한 결단이었다. 그 결단이 없었다면 그날의 함성은 결코 거국적인 민족 운동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삼일 운동은 최초의 낭독자, 시골 전도사 정재용의 용기 덕분에 가능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평화롭고 소중한 시간을 보내며 청년 정재용을 기억해 본다. 비범한 역사를 만든 평범한 전도사. 103년 전 그의 용기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안지영 님/역사해설가
- 좋은생각 2022년 5월호 84∼8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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