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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레터링의 아버지, 김진평

튼씩이 2022. 6. 20. 07:56

‘레터링(lettering)’은 시각적 효과를 고려하여 문자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일로서 손으로 직접 글자를 쓰거나 잘라 붙이는 등 여러 수단을 통해 글자꼴을 디자인하는 것을 뜻한다. 의도적으로 글자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일상의 글씨 쓰기와는 다르며 ‘글자 그리기’, ‘글자 표현’, ‘문자 도안’이라고도 한다.

 

요즘은 발전한 도구와 장치를 이용하여 디지털상에서 디자인하고 이를 쉽게 출력할 수도 있지만,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글을 인쇄하는 기계조차 일본에서 모두 수입하였다. 또한 새로운 한글 글꼴을 디자인하려면 디자이너가 직접 운형자(곡선을 그리는 데 쓰는 구름 모양의 자)를 이용해 손수 그려야 했다. 모눈종이와 운형자, 이 두 가지만으로 척박한 한글 디자인 분야를 적극적으로 개척한 사람, 한글 활자 연구가 김진평(1949~1998)을 만나보자.

 

김진평의 한글 레터링

 

김진평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합동통신사 광고 기획실에 근무하며 한국판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의 아트디렉터를 맡았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세계적인 잡지로, 각종 읽을거리를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잡지로 제작하였는데 1979년에는 한국판이 창간됐다. 아트디렉터 김진평은 직접 디자인한 헤드라인 제목을 선보이며 한글 레터링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잡지 제목뿐 아니라 회사명 로고타이프와 캠페인 문구 등도 작업했다. 글자의 라인을 강조하며 글자 안팎에 그림자 효과를 주거나 글자의 일부 자소 형태를 그래픽 요소로 바꿔 표현하기도 했다. 붓글씨를 본뜬 글자, 영어 필기체를 닮은 글자, 아라비아 문자를 떠올리게 하는 글자, 머리카락 끝이 돌돌 말린 것 같은 글자 등 다양한 글자꼴을 표현했다. 이 많은 작업들이 모두 모눈종이 위에서 운형자의 섬세한 놀림과 정밀한 각도 계산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그가 다양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문자 도안을 탄생시킨 것은 한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종류의 서체를 분석하고자 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 활자를 위한 연구

 

1980~1990년대에는 특별한 목적 없이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는 일이 없었다. 당시에는 한글 활자 디자인을 하려면 많은 자본과 긴 시간이 필요했고, 디자인은 대부분 대량 생산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수요와 자본이 뒷받침될 때에야 비로소 한글 활자가 만들어지는 상황이었다. 한글 활자는 1980년대까지 활자 도안가나 활자 조각가가 맡아서 작업하고,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은 광고용 상표나 제목 몇 글자를 그리는 작업을 할 뿐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김진평은 ‘한글 로고타입의 기초적 조형 요소에 관한 연구’, ‘한글 타입페이스의 글자 폭에 관한 연구’, ‘글자체 변형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으로 한글 디자인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83년 출판한 그의 저서 ‘한글의 글자 표현’은 한글 활자의 조형 이론을 세우고 그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당시에는 활자의 원그림을 그렸던 최정호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글 활자의 조형을 설명한 것 외에는 한글 활자에 대하여 이렇다 할 조형 이론이 없었다. 김진평은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활자 제작법과 글자꼴의 변화를 연계하여 한글 글자꼴의 역사와 변화를 정리했다. 그는 글자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했는데, 한글의 모든 글자꼴을 서로 비슷한 것끼리 묶어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변하는 글자 균형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명조체와 고딕체, 그래픽체, 굴림체 등 당시 보편적으로 쓰이던 활자 구조에 대해서도 최초로 설명했다. 김진평의 저서 ‘한글의 글자 표현’은 이후 초기 디지털 한글 폰트 디자인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현재까지 한글 활자와 레터링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한글 활자 조형 이론의 기초를 다룬 입문서로 자리매김했다. 한글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글 로고타이프를 디자인하고,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체계화하는 데에 큰 업적을 세운 김진평은 한글의 심미성을 간파하고 이를 수준 높게 활용한 활자 디자인의 선구자였다.

 

 

※ 참고 자료


김진평, <한글의 글자표현>, 미진사, 1983.
유정미, <잡지는 매거진이다>, 효형출판, 2002.
유정숙·김지현, <한글공감>, 안그라픽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