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왕실문화 인문강좌(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세자 - 세자의 관례

튼씩이 2022. 6. 23. 07:55

5. 세자의 관례


관례(冠禮)는 성년식을 의미한다. 관례를 치르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에 관례라 했다.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서 계례(笄禮)라고 했다. 어린이와 성인은 머리모양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사대부가의 자녀인 경우, 결혼하기 전 15세~20세에 적절한 해의 정월에 날을 정해서 관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관례를 치르는 사람은 《효경(孝經)》이나 《논어(論語)》에 능통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익히고 있어야 했으며, 그 부모가 기년(1년) 이상의 상복이 없는 경우에만 거행할 수 있었다. 관례를 혼례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비록 미혼이더라도 관례를 마치면 성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성인이 되면 낮춤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으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남자는 자(字)를, 여자는 당호(堂號)를 불렀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례(冠禮)가 처음부터 보편화된 것은 아니었다. 관례는 고려조까지 태자를 대상으로 치루어지던 일종의 국가행사였다. 고려말 신유학의 보급으로 점차 사대부들의 의식이 변화하면서 신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관례는 유교를 국시(國是)로 정한 조선왕조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확산시켜 나가고자 한 일종의 정부시책이 되었다. 이러한 본보기로서 먼저 태종대에는 종친(宗親)과 공신(功臣)들을 대상으로 관례를 치르고 일정한 나이가 경과해야만 벼슬살이를 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기도 하였다. 세종대에는 명나라에서도 관례가 모든 신분계층에서 실시되고 있는지를 질의했을 정도로 관례의 전면적 시행여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종년간의 사례를 살펴보면 민간에서는 모두 행하지 않으나 풍속이 전해지는 수준이었다. 관례는 사족사회 일부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정도여서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새로운 유교전통이었다. 따라서 정착되는데 상당한 진통과 세월을 거쳐야 했다. 당시 국가의례의 결집체인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관례도 강구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평하였을 정도로 쉬 보편화되지는 못하였다. 15세기 후반 성종대에 가서야 오랜 논의 끝에 《국조오례의》(1474)를 통해서 세자의 관례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다. 최근의 민간일기류 연구에서도 16세기 중후반 사대부가의 일상을 다루고 있는 《미암일기(眉巖日記)》(1567~1577) 단계에서야 약식으로 나마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국가의 전례(典禮)가 민간으로 확산되는 데에 약 1세기 간의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관례의 전통은 왕실의 관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할 것이다.


세자의 관례는 세자 책봉식을 전후하여 거행되었다. 그러나 어느 의례를 먼저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해지지 못하였다. 중종대와 인조대에는 관례와 책례에 대한 선후논쟁이 일어날 정도였다. 대체로 중종과 인조의 입장은 남자가 성인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 관례를 치룬 후에야 각종 의례가 까다로운 세자 책봉식 등을 진행해야 사리에 맞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정국운영의 변수 등으로 심지어 강보에 싸인 원자조차도 책봉의례를 받으리만큼 세자 책봉은 급속히 진행된 예가 많았다. 그래서 책례를 먼저 진행한 사례와 관례후 책봉례를 행한 사례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까닭에 관례를 올리는 나이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통상적인 경우에는 대략 8세~12세 사이에 치러진 것으로 확인된다. 아래의 표를 참고해 보면 책례와 관례의 선후를 검증하기는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예종, 현종, 순조 등이 관례와 책례를 같은 해에 치루었으며, 인종, 숙종, 경종, 정조, 순종 등이 책례를 먼저 받았다. 그래서 이러한 경향만으로는 책례가 먼저일 듯하나, 전자의 책례와 관례를 같은 해에 받을 때에는 대체로 관례가 먼저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는 절차상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를 우선시하고 있어서 같은 해에 진행할 경우에는 당연히 관례를 우선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정국운영의 변화상 책봉이 급박할 경우에만 관례 이전에 책례를 진행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가례(혼례)는 반드시 관례 이후에 진행되었으며, 이는 반드시 성인식을 거친 이후에 혼인을 하도록 제도화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