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자의 탄생과 원자생활
세자의 일생은 탄생에서 시작된다. 세자의 탄생을 위해 이미 지극한 정성을 들인 태교가 수행되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성군(聖君)이 되기를 원하는 바람 속에서 최고의 정성을 기울인 태교가 시도되었다. 조선초기부터 이와 관련하여 《태산요록(胎産要錄)》이 만들어졌고, 이후 《태산집요(胎産集要)》나 《태교신기(胎敎新記)》와 같은 기록이 저술되었다.
세자의 출산을 위해서도 조선의 왕실에서는 출산전담기관으로 비빈(妃嬪)을 위한 산실청(産室廳)과 후궁을 위한 호산청(護産廳)을 두었는데 산실청은 중전의 경우 3개월 전에 설치하며, 산실청 설치 기간에는 형벌 집행을 하지 않고 출산 후 7일째 되는 날 산실청을 폐지했다.
아직 세자가 되기 전 단계인 원자(元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여 원자의 보호와 양육을 담당하도록 했다. 보양청은 원자와 원손(元孫)의 교육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숙종 때 이름을 ʻ보양청ʼ으로 정하였다. 공식적으로 원자(元子)의 보호와 양육을 담당한 곳이 보양청(輔養廳)이었지만 원자(元子)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등 사실상의 양육은 왕비(王妃)와 유모(乳母) 및 궁녀(宮女)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원자가 영아기를 지나 글을 배울 때쯤인 네 살 정도가 되면 보양청은 강학청(講學廳)으로 바뀐다. 네 살이면 인지가 발달하여 교육을 시킬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원자는 평생을 가야할 길, 바로 제왕학(帝王學)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다. 어린 원자가 교재에 담겨 있는 유교의 교리를 모두 이해하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그저 사부가 가르치는 대로 한문의 음과 뜻을 따라서 외우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원자의 연륜이 쌓이고 학문이 성숙되면 그 의미는 자연 터득하게 마련이다. 원자가 여덟 살 전후가 되면 세자에 책봉(冊封)된다. 세자가 되면 강학청은 세자교육을 위한 서연(書筵)으로 바뀌게 된다.
3. 세자의 교육
조선의 세자는 ʻ국본(國本)ʼ으로 불리며 다음 대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로서 왕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위상을 부여받은 존재였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정기와 생명력이 핏줄을 통해 후대로 전승되어 내려간다고 믿었던 유교 사회에서, 가문의 적통을 이을 장자(長子)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대부 가문에서 적장자는 다른 형제ㆍ자매들보다도 우선하는 존재였으며, 부모들은 그에게 좋은 스승을 소개하고 학문의 길을 넓혀주는 등 최고의 교육환경을 제공함으로써 가문의 위상과 품격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일반 사대부가의 적장자도 그러한 위상을 부여받은 존재였는데, 그가 일개 가문이 아닌 국가 내에서 최고의 권위와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왕실의 계승자인 세자라면 그 중요성 역시도 전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세자는 다음 대의 왕이 될 인물이었으며, 따라서 세자의 출생부터 보양, 교육에 이르는 모든 부분은 차대(次代)의 국가가 어떻게 운영될 것인가와도 밀접하게 연관되는 문제였다. 왕통(王統)의 계승자이자 성학(聖學)을 수양하여 성군(聖君)으로 전진하여 한 국가를 다스리는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존재가 국왕이었기에, 예비 국왕으로서 세자의 존재와 그에 대한 교육은 어찌 보면 이미 성인이었던 국왕보다도 더 중차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세자의 교육은 그의 존재가 시작되는 출발점, 잉태가 확인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태교(胎敎)는 세자 교육의 출발점으로서 지대한 위상을 부여받았으며, 왕실 여인들이 반드시 익히고 따라야만 하는 최고의 덕목이기도 하였다. 아직 인격이 형성되기도 전인 태아 단계에서부터도 세자는 그 엄중한 체모와 존재로 인하여 세심한 보호를 받았으며,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틀을 제공받고 있었다. 비록 현대 의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태교의 상당 부분은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세자에게 최고의 신체와 교육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을 잉태의 순간부터 기울였다는 사실은 조선 왕실에서 세자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지난한 태교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세상의 빛을 받은 원자(元子)1)는 출생의 순간부터 또 다른 단계의 교육을 접하게 된다. 원자의 탄생 이후 신속히 보양청(輔養廳)이 설치되며, 영아기를 지나 어느 정도 인지가 발달한 후에는 강학청(講學廳)이 신설된다. 보양(輔養)과 강학(講學)이 주는 어감에서 알 수 있듯이 원자의 양육을 지원하는 기관이 아닌 원자의 학문을 강습하는 기관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원자가 본격적인 교육의 장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의 교육은 아직 본격적인 유교교육이라기 보다는, 앞으로의 학습을 준비하는 예비적인 교육, 곧 유아교육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곧 유교 경전의 학습에 필수적인 한자를 익히고, 한문 학습의 방법을 체득함으로써 차후 ʻ성학(聖學)ʼ을 습득할 기반을 닦았던 것이다. 이 시기 원자는 유교 학습의 최초 단계였던 《천자문(千字文)》,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등을 강학했다. 특히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소학》을 학습함으로써 성리학적 윤리와 규범을 점차 내면화해가고 있었다.
1) 세자와 원자는 엄연히 구분되는 존재이다. 앞서 이용한 ‘세자’의 용례는 일반적으로 왕위 계승자를 통칭하여 말한 것이었으나, 이후로는 출생 후 원자의 단계를 거쳐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을 감안하여 ‘원자’, ‘세자’를 구분하여 사용하도록 하겠다.
원자가 대략 여덟 살 정도의 나이가 되면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자는 조정의 논의가 시작된다. 원자의 학문과 인격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판단한 대신들이 세자 책봉을 건의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 책봉례를 거쳐 비로소 원자는 세자로 거듭나게 된다.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드디어 대통(大統)의 계승자로 공인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세자의 책임과 의무 또한 막중해진다. 이제 세자는 언제라도 부왕(父王)이 변고를 당했을 때 그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라야 할 존재가 되었으며, 따라서 세자의 교육과 학업 역시 이전 시기보다 한 단계 올라선, 높은 수준을 지향하게 된다. 원자 시절의 강학청은 이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으로 바뀌게 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라는 전속 관료들을 거느리게 된다. 또한 원자 단계에서 유교 학습을 위한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부터 비로소 서연(書筵)을 열고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익힘으로써 국왕의 학문, 곧 성학(聖學)에 매진하게 된다. 이러한 세자 시절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초ㆍ중등교육에 해당되는 것으로, 헌종(憲宗)과 같이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될 경우 초등교육 단계에서 세자교육이 종료되나, 영조(英祖)나 정조(正祖)와 같이 20대가 넘어서 즉위할 경우 고등교육의 수준으로까지 학습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자교육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의례가 바로 성균관 입학례이다. 성균관은 조선의 유교교육 체계에서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던 상징적인 기구였으며, 동시에 문선왕(文宣王)인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신성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세자가 직접 성균관에 행차하여 공자에게 제향하고, 사부를 모시는 입학례를 행한다는 것은 세자 자신도 유교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만방에 공표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으며, 다음 대의 정치도 유교 이념에 기초하여 행해질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세자의 실제 교육은 세자시강원의 담당 관리들이 주관하였으며, 세자가 성균관에서 여타 유생들과 함께 학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책봉 직후 세자가 입학례를 행함으로써 예비국왕의 성학 역시도 일반 사대부들의 유학과 다르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유교에 입각한 정치체제를 다시 한 번 공인할 수 있었으며, 세자 역시도 자신이 공자의 제자임을 자임함으로써 유교국가체제는 더욱 공고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세자의 교육은 특정한 개인에 대한 교육을 넘어서, 조선 국가의 다음 대를 책임질 예비국왕의 교육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따라서 세자 교육의 매 측면은 상당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으며, 국가 운영에 대한 거시적인 계획과도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었다. 곧 유교에 입각한 정치체계를 마련하였던 조선에서 세자 교육은 유교적 제왕학, 곧 성학에 입각한 성군을만들어내는 예비과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가 체계와 유교 정치체제는 안정되게 재생산될 수 있었으며, 왕실의 왕통(王統)과 유교의 도통(道統) ㆍ학통(學統) 역시 상호 연관되면서 지속적으로 확보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러한 정치 이념과 체제가 다시 세자 교육에 투영되고 강화됨으로써, 유교 정치 체제를 재생산하는 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
성균관 입학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가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이다. 국립고궁박물관 및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자료는 1817년(순조17)에 거행된 효명세자의 입학식을 기록한 책자로, 4종의 의식 절차와 6첩의 기록화를 수록하고 있다. 왕세자의 입학식 절차는 크게 출궁의(出宮儀 : 궁궐에서 성균관에 도착할 때까지의 의례), 입학의(入學儀 : 성균관에서 치르는 실제 입학식의 의례), 수하의(受賀儀 : 입학례를 마친 세자가 궁으로 돌아와 신하와 종친의 축하를 받는 의례)로 구분되는데, 기록화는 이 중 출궁의와 입학의의 네 절차, 수하의의 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기록화를 중심으로 입학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출궁도(出宮圖)>는 효명세자가 창경궁을 나와 성균관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행렬의 선두에는 세자를 호위하는 세자익위사의 관원들이 앞장을 서고 있었으며, 행렬의 중앙에는 세자를 상징하는 도장(印)을 실을 말이 지나가고 있었다. 세자의 가마 앞에 교육을 실제 담당한 세자시강원의 시강관들이 지나고 있었으며, 그 뒤에 세자가 탄 가마가 지나가고 있었다.
두 번째 <작헌도(酌獻圖)>는 세자가 성균관에 도착하여 대성전(大成殿)에 모셔진 공자와 사성(四聖 : 顔子ㆍ曾子ㆍ子思ㆍ孟子)의 신위에 술을 올리는 의식을 묘사한 것이다. 공자와 사성은 유교의 최고 성인으로서, 세자는 입학식을 거행하기 전 먼저 유학의 성인들에게 인사를 올린 것이다. 세자는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먼저 공자에게 술을 올린 후, 이어 네 성인에게 술을 올렸다.
세 번째 <왕복도(往復圖)>는 세자가 스승에게 수업을 청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세자는 다음 대의 국왕으로 현재의 국왕 다음의 지엄한 존재였으나, 입학례에서 세자는 한 명의 학생으로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따라서 세자는 스승에게 올릴 예물을 갖추고 장명자(將命者)라 칭하는 일종의 전령을 통해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스승이 허락을 하면 비로소 명륜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네 번째 <수폐도(脩幣圖)>는 스승에게 미리 갖추어 둔 예물을 올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세자가 예물이 든 광주리를 받은 다음 스승에게 먼저 두 번 절을 하면, 스승도 답으로 두 번 절을 한다. 입학례에서 세자는 학생의 입장이기 때문에 세자가 먼저 절을 하고, 스승이 이후에 답을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입학도(入學圖)>는 세자가 스승에게 수업을 받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전체 입학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특이한 것은, 스승의 앞에는 책상이 있는 반명 세자의 앞에는 책상이 없어서 세자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엎드려 수업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세자와 스승의 위상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세자가 그만큼 학생의 입장에서 유학에 정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효명세자의 입학례 당시 세자와 사부 남공철(南公轍)은 《소학》을 강의하였다.
마지막 <수하도(受賀圖)>는 세자가 입학례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여러 신료와 종친의 축하를 받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입학례를 마침으로써 세자이자 유학에 전념하는 학생으로 자리매김한 세자를 축하하기 위함이었으며, 궁으로 돌아온 세자가 다시금 왕위를 이을 존귀한 존재로 돌아와 평상시와 같은 위치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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