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재미있는 우리 속담 - 장수 나자 용마 난다

튼씩이 2022. 7. 7. 07:03

옛날 어느 가난한 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 낳고 삼 일 만에 아이를 낳은 어미가 목이 말라 부엌에 가서 물을 마시고 방에 들어오니 아이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아이를 찾아보니 아이가 물건을 얹어 놓던 선반인 시렁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습니다. 어미가 얼른 아이를 내려 살펴보니 아이의 겨드랑이 밑에 자그마한 날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어미가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자 남편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길, '가난한 집에 남다른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 아이가 자라 역적이 될 것이 분명하고 이 아이가 역적이 되면 우리 마을도 화를 피할 길 없으니 아이를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이 뜻을 따라 아이를 기름 짜는 틀에 넣거나 쌀가마니로 눌러 죽이려 하자 아이가 살고자 버둥거렸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끝끝내 아이를 죽이자 뒷산에서 용마가 나타났습니다. 용마는 자신이 태울 주인이 사라졌음을 알고 마을 앞 소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때부터 마을 뒷산을 용마산이라 부르고 마을 앞 소를 용소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주도에서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이 땅 곳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아기장수 이야기'입니다. 이웃한 나라나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에서만 전승되어 오는 구전 이야기지요. 구전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고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일컫는 말입니다. '아기장수 이야기'는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 전국적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여서인지 '아기장수 이야기'에서 유래한 속담도 있습니다. 바로 '장수 나자 용마 난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그에 짝이 될 만한 일이 함께 일어난다거나, 혹은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경우 반드시 짝이 되어야 할 두 일이 간발의 차이로 어긋나는 상황을 빗대는 의미로도 쓰이지요. 장수가 용마를 만나야 일이 성사된다는 뜻을 드러내면서, 장수가 용마를 만나지 못할 운명임을 암시하는 말로도 쓰이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이처럼 옛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쫓기던 토끼 벼랑 바라보듯 한다'는 말은 <토끼전>에서, '놀부 심보가 따로 없다'는 말은 <흥부전>에서 유래한 속담입니다. <춘향전>에서 유래한 '춘향이네 집 가는 길 같다'는 말도 있고, <소대성전>에서 유래한 '소대성이 이마빡 쳤나'•'소대성이 모양으로 잠만 자나' 등의 속담도 있습니다. 판소리나 민요의 한 대목이 속담으로 전승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노래나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숱하게 오르내리고 사람들 귀에 무수히 들락거리다 보면 그것이 삶의 지혜나 보편적인 상식으로 굳어져 속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들은 모두 속담으로 굳을 만큼 사람들 사이에 보편적인 관념으로 자리 잡은 어떤 생각과 태도를 대변합니다.

 

'아기장수 이야기'가 대변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상식은 대체 어떤 내용일까요? 어떤 의미이기에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이야기를 그토록 오래 전승해 온 것일까요? 더구나 이 이야기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동화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기를 바랐던 걸까요?

 

아기장수는 날개 달린 사람들의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부모에게 죽임을 당할 까닭이 없었을 겁니다. 날개 없는 사람들의 세상에 날개 달린 아이가 태어난 것이 문제지요. 아기장수의 날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눠 가지고 있는 어떤 '같음'과는 다른 '차이'를 의미합니다. 이 '차이'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를 위험에 빠트릴 요소로 인식됩니다. 공동체의 '어른'들은 이 '차이'를 강박적으로 배제할 만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집단 폭력을 부모로 하여금 대신 이행하게 하지요. 결과적으로 태어난 지 삼 일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자신의 부모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아이들은 '아기장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발을 들여놓을 공동체가 인정하지 않는 '차이'를 가진 채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직감할 겁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버려야 한다는 것을 무시무시한 공포 속에 깨닫게 되겠지요. 누구에게든지 마지막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어야 할 자신의 부모가 바로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공포 속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어린 아이를 꼭 죽여야 할 만큼 그 '차이'가 위험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될 겁니다. 또 아기장수가 너무 가엽고 억울하다는 생각도 하겠지요. 한편으로는 공동체가 요구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를 버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며 반항하고 싶어질 겁니다. 이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달려가는 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것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기장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을 공동체의 어른들이나 아기장수의 부모도 아마 태어날 때는 모두 날개 달린 아기장수였을 겁니다. 갓 태어나 처음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다르고' 또 달라서 얼마나 어여쁜가요. 너무나 개성적이고 제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던 아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거쳐 사회인이 되면서 어느새인가 너무나 '똑같은' 사람들로 변해 갑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화'의 효과이자 힘이겠지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곧은 나무가 쉬 꺾인다'거나 '곧은 나무가 먼저 꺾인다'는 말도 있지요. 모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대변하는 말들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 속에서 내가 '다르다'는 사실만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게 또 있을까요? 다른 친구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거나 다른 친구들이 잘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만큼 우리 아이들을 두렵게 하는 것도 없을 겁니다. 서로 다른 채, 아니 서로 달라서 더 잘 살 수 있고 더 아름다운 그런 세상은 정말 어디에도 없는 걸까요?

 

 

글_ 김영희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