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한국어 교육, 그리고 우리 - 대화? 또는 질문!

튼씩이 2022. 9. 13. 07:48

고속철이 나오기 전까지, 기차란 대표적인 장거리 여행 수단이었다. 이용자가 비교적 긴 시간을 머무는 공간인지라, 자리에 앉으면 으레 ‘어디까지 가세요?’라며 옆 사람과 인사부터 나누곤 했다. 동행자가 있는 사람에게는 같이 앉아 가라며 자리를 바꿔 주는 일도 예사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문화였다. 오늘은 25년 전 기차에서 겪은 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차에 오르니 창 쪽 자리에 할머니 한 분이 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하며 앉는데, 할머니가 물으신다.

 

“어디까지 가요?”
“조치원까지 갑니다.”
“조치원에는 왜 가요?”
“집이 청주인데요, 청주에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요.”
“청주가 집인데 왜 대구서 타요?”

 

 

그 이후로도 질문은 이어졌다.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등등 할머니의 궁금함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질문을 받으니 슬슬 꾀가 난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다음 질문이 나올 것이니, ‘아니다, 없다’와 같이 답해야겠다는 전략을 나도 모르게 세우는 것이다. 답하기 싫은 불편함이 밀려들 즈음, 다음 역에서 다른 사람이 탔고 연이은 질문 공세는 다행히 그쳤다. 신상에 대한 이어진 질문, 이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경찰이 취조하듯 일방적으로 묻는 것은 오히려 심문에 가깝다.

 

이런 소통 방식은 구식 기차와 함께 사라졌을까? 고맥락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 사회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인간관계와 정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고 관심을 드러내는 것도 자연스럽게 허용된다. 그러한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나, 이것이 선을 넘는 빌미를 제공하는 점은 생각해 볼 일이다. 상대에게 질문으로 말을 거는 방식은 한국에서 여전히 흔하다. 이러한 대화 방식이 한국어 교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예) ○○ 씨, 주말에 뭐 했어요?

      ○○ 씨는 무슨 과일을 좋아해요?

      ○○ 씨, 그 모자 어디에서 샀어요?

      ○○ 씨, 요즘 한국 생활이 어때요?

      ○○ 씨, 부모님께서는 어디에 계세요?

 

 

위 예는 한국어 교재 대화문의 일부로, 모두 본문 대화의 첫 문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친한 사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들이나, 맥락상 그런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상담심리학에서는 위와 같은 말을 ‘탐색적 질문’이라고 부른다. 탐색적 질문은 여러 사람과 알아 가며 다양한 정보를 얻는 데 필요한 말이다. 한국어 교재를 통해 학습자가 배울 대화는 대인관계 역량을 강화하고 의사소통을 촉진하는 예시로 채워지는데, 탐색적 질문은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한국어 교재의 대화문에서 첫말이 탐색적 질문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주말에 뭘 하는지, 누구 생일 파티를 가는지, 선물은 준비를 했는지, 무슨 선물을 살 것인지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묻고 답하기는 학습자의 대인관계 역량 강화라는 본질과 거리가 멀다. 다문화적 배려나 공감 유도, 경청과 지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정보 탐색에 집중하는 사례이다.

 

누군가의 탐색적 질문에 청자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 것인가? 그런 질문에는 일반적으로 자기를 개방하는 응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무슨 과일을 좋아해요?’라고 물어 온다면 ‘사과를 좋아해요.’라고 답을 해야 하고, ‘이번 주말에 뭐 할 거예요?’라고 물어 오면 ‘친구 집에 가요.’처럼 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 자신을 선뜻 개방하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답을 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성인 학습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외국어를 배우러 온 교실이라 하여 사생활을 털어놓아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은 처지를 바꿔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실제로 교사와 학생이 친밀도가 낮을 때, 어색한 침묵을 벗어나려는 한국인 선생님들은 흔히 ‘밥 먹었어요?’라며 시작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습자들도 이 정도는 한국 문화로 보고 ‘네’라며 무심하게 답한다. 문제는 그다음에 선생님이 ‘뭐 먹었어요?’, ‘어디서 먹었어요?’, 또는 ‘누구하고 먹었어요?’와 같은 질문을 습관적으로 이어 가는 경우이다. 그 순간 타문화권 학습자들은 당황한다. 이미 그런 상황을 겪어 본 학습자는 대화를 이어 가지 않으려, 전략적으로 부정적인 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시작은 말을 쉽게 꺼내고 좋은 말을 배우려는 언어 교실에 맞지 않는다.

 

외국어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 언어의 사용을 보여 주는 본보기이다. 교재에서 명시적으로 제공하는 대화는 교육 목표를 달성하는 내용이므로 더욱 그러하다. 대화란 말 그대로 ‘주고받는 이야기’이고, 대화를 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관계의 증진이다. 상대와 상황에 대한 탐색과 더불어, 경청하고 지지하며 공감해 줄 대화의 적절한 선은 어디일까? 그 선을 찾아가는 일이 문화가 다른 이들이 모여 있는 한국어 교실에서 새로운 숙제가 되고 있다.

 

 

 

이미향(영남대 글로벌교육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