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정겨운 토박이말과 문학의 향기, 통영 2편

튼씩이 2022. 9. 27. 07:58

통영 여행의 이튿날이 밝았다. 전날의 여운을 간직한 채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우리말의 발자취를 따라 부지런히 통영을 누볐다.

 

충렬사 계단에서 부르는 연가

서피랑 마을이 있는 명정동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도 있다.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어 한번에 둘러보기 좋다. 이번 여행에서 충렬사에 들른 것은 충무공보다는 시인 백석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싶어서다. 충렬사 맞은편 길가에는 백석의 「통영2」 시비가 세워져 있다. 통영 출신이 아닌 시인의 시비로는 이것이 처음이다.



백석은 바로 이곳 충렬사 계단에 앉아 통영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더 정확히는 통영 출신인 그의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쓴 시다. 백석이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난 18세 통영 아가씨 박경련에게 반해 몇 번이고 통영을 왔다가 만나지 못하자 낮술을 하고 충렬사 계단에 앉아 썼던 시가 「통영2」이다.
통영을 표현한 글귀 중 그 유명한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토록 통영이란 고장과 꼭 맞는 표현이라니! 지금 읽어 봐도 멋들어진 글귀다.

 

구마산의 선창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잘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가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녁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하략)

-백석, 「통영2」

 

꽃의 시인 김춘수를 만나다

시인 김춘수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중앙시장 근처에 그가 태어난 집이 남아 있다. 여행자와 토박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을 자아내는 동네다. 그의 생가는 좁다란 골목 안쪽에 있다. 지금은 이곳 주민이 살고 있는데, 통영시에서 김춘수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교과서에서 익히 봤던 시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이 수놓아져 있다. 시험 문제로 풀 때는 별 감흥이 없더니만, 그가 살던 고향 집 앞에서 가만히 시구를 바라보고 있자니, 고운 우리말이 가슴 속에 더 와닿는다.

 

‘기림을 온 베르빡에 기리노이 볼끼 새빈’ 동피랑

 

중앙시장 바로 옆 동네, 태평동으로 가면 동피랑 벽화 마을이 있다. 강구안 언덕길에 있는 동피랑은 마을 곳곳이 벽화로 장식되어 있어 볼거리가 많다. 주말이면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통영의 관광 명소다.

동피랑 마을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뜻밖에 통영 전통 연(鳶) 벽화다. 마을 입구 담장에 수십 가지 전통 연이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만들어 섬과 섬, 섬과 육지 사이의 통신과 전술 신호 수단으로 사용한 연을 그려 놓은 것이다.
각각의 그림 아래 ‘윗까치당가리연’, ‘아래까치당가리연’, ‘기바리 눈쟁이연’, ‘청치마머리 눈쟁이연’ 등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모두 연의 생김새와 썩 잘 어울린다. 하나씩 소리 내서 읽어보니 생소하긴 해도 어감이 재미있다.

동피랑 마을의 꼭대기에 다다르면 저 멀리 강구안이 내려다보인다. 오밀조밀하고 아담한 포구 마을을 바라보며 잠시 땀을 식히기에 좋다. 강구안에는 고깃배가 수시로 들락거리고 항구 바로 앞에는 북적이는 시장이 있다. 통영의 정취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강구안은 여행자들이 꼭 들르는 곳이고, 동피랑은 그런 강구안을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강구안을 눈에 담고 몸을 돌려 아래쪽으로 난 길로 걷다 보면 통영 토박이말로 쓰인표지판들이 나타난다. 통영 사투리가 생소한 이방인을 피식 웃음 짓게 만든다. 눈으로만 훑어보지 말고 소리 내서 따라 읽어 보길 권한다. 강세가 강한 경상남도의 말맛을 살려 읽으면 더 재미있다. 해학미가 넘치는 통영 토박이말의 매력에 빠져들 것이다. 즐겁게 따라 읽다 보니, 이 지역만의 정서가 살아 숨 쉬는 토박이말이 오랫동안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통영에 와서 걸출한 작가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문장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컸지만, 우연히 마주친 통영 토박이말은 우리말의 생생함을 재발견하게 해 줬다.

 

통영 우리말 여행을 기념하며

여행의 마침표는 자그마한 동네 책방이다. 복닥거리는 서울이 싫어, 멀리 통영으로 이사 온 부부가 운영하는 ‘봄날의 책방’이 마지막 목적지다. 봉평동 전혁림미술관과 이웃해 있는 이 책방은 동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듯하다. 주택을 개조한 서점 벽면에는 박경리, 김춘수, 백석, 윤이상 등 통영과 인연이 깊은 예술가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통영 출신 작가들의 책을 따로 모아 놓은 공간도 있다. 필자는 통영 여행을 기념하며 ‘시 카드’ 한 장을 샀다. 밀봉된 봉투 안에 시 한 편이 담겨 있는 일종의 문학 상품이다. 박경리, 김춘수, 백석, 김소월, 윤동주, 이상, 김상옥 등의 시가 무작위로 들어 있다. 어떤 시가 들어 있는지 모른 채 사는 것인데, 뜻밖에 기분 좋은 기대감이 일었다.

통영 나들목을 빠져나오며 살며시 봉투를 열었다. 고향 통영의 토박이말을 소개한 김춘수의 시 「앵오리」가 나를 따라왔다. 통영으로 떠나온 우리말 여행을 기념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글·사진: 정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