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찰나의 우리말 - 존댓말을 들으며 진짜 알아야 할 사실

튼씩이 2022. 10. 17. 17:32

박사를 마치고 처음 강단에 섰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의외로 강의 그 자체가 아니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필자에게는 출석을 부르는 일과 강의 전후에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강의를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출석을 부르려면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런데 다 큰 대학생들의 이름을 그냥 부르려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름 뒤에 ‘씨’를 붙여 출석을 불렀다. ‘김네모 씨, 이세모 씨’ 이렇게 말이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몹시 어색해했다. 게다가 와르르 웃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양해를 구한 후에 이름을 부르는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몹시 어색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혼자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마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처럼 궁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네모, 이세모’처럼 이름만 부르게 되었다. 나만 좀 불편하면 다른 사람들이 편해지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학생들과 강의 이외의 시간에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도 존댓말이 문제였다. 강의 중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존댓말로 강의를 진행하는 것에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강의 중에 학생이 한 질문에 답을 할 때도 존댓말을 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의 전후에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가 문제였다. 대학생들이니 존댓말을 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서 존댓말을 썼더니 학생들이 몹시 불편해했다. 더 큰 문제는 거리감을 느낀다는 데 있었다. 여러 번 만났는데도 계속 존댓말을 썼더니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말을 편히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학생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좋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그때부터 강의 중이 아니면 수강생들에게는 존댓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높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한국어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필자처럼 높임말과 관련된 마음속 줄다리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존댓말을 쓰자니 거리감이 생기고 존댓말을 안 쓰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존댓말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런 일상의 줄다리기는 시시때때로 벌어진다. 예를 들어 동창회에서 삼사십 년 만에 만난,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친구를 만났을 때가 그렇다. 말을 놓아야 할지, 높여야 할지 고민이 된다. 만나자마자 대뜸 말을 놓는 친구에게 딱히 불쾌감을 느끼지 않지만 그렇다고 같이 말을 놓자니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도저히 말이 놓아지지 않아서 말을 계속 높이면 그 친구는 어색해하며 거리감을 느낀다. 서로 어색해지니 그 자리가 즐거울 리가 없다.

한국어는 높임법이 발달한 언어다. 한국어의 높임법에는 주체 높임, 객체 높임, 상대 높임이 있다. 주체 높임과 객체 높임은 각각 말하는 사람과 문장의 주어에 등장하는 사람, 말하는 사람과 문장의 목적어나 부사어에 등장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따져서 결정된다. 이와는 달리 상대 높임은 문장 안의 성분과 말하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과 문장 밖의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즉, 말하는 사람과 그 말을 듣는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 공적인 상황인지 사적인 상황인지 등이 상대 높임을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말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상대 높임

 

세 가지 높임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상대 높임이다. 문장 성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내 앞에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바로 내 앞에 있기 때문이다. 더더욱 주체 높임이나 객체 높임과는 달리, 상대 높임은 상대에 맞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말이 완성되지 않는다. 한국어로 말을 적절하게 끝맺으려면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말하는지를 따져서 상대 높임을 결정해야만 한다. 만약, 누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말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한국어로는 아주 간단한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밖에 눈이 오는 장면을 보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말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적절한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의 최대치는 ‘눈이 오-’까지이다. 적절한 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눈이 와’라고 할지, ‘눈이 와요’라고 할지, ‘눈이 옵니다’라고 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말의 거리, 말의 계급

 

이렇듯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가 언어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한국말을 들으면 말하는 사람이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이 실현한 것과 듣는 사람이 기대한 것이 일치한다면 물론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면 대화는 결코 즐거울 수 없다. 초면에 대뜸 반말을 쓰면 언제 봤는데 반말인가 화가 나는 이유도, 이제는 말을 놓아도 될 것 같은데 계속 존댓말을 쓰면 거리감이 느껴지며 자신을 친밀하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서운해지는 이유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생긴 이 거리의 차이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어의 높임말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오해를 만들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요소일 수 있다. 존중해 주고자 쓴 존댓말이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태도로 해석될 수도 있고, 친근함을 드러내고자 쓴 반말이 무시하는 태도로 오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말을 하는 사람이 선택하여 실현한 높임법을 들으며, 자신에 대한 대우에 더 신경을 쓰느라 말의 내용을 들으려 하지 않는 일이 흔히 일어나기도 한다.

 

더욱이 상대에게 사용하는 말의 등급이 상대와 나와의 계급 차이 혹은 신분 차이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존댓말을 하는 사람은 낮은 계급 혹은 낮은 신분이고 반말을 하는 사람은 높은 계급 혹은 높은 신분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말을 하고 존댓말을 듣는 사람을 ‘윗사람’, 반말을 듣고 존댓말을 하는 사람을 ‘아랫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말이 주는 ‘아랫사람’, ‘윗사람’ 의식 때문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적은 사람들을 존중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보통 ‘싸가지가 없다’거나 ‘예의가 없다’는 말은 나이가 같거나 많은 사람이 나이가 같거나 적은 사람에게 한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싸가지가 없다’거나 ‘예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싸가지 없는 일’이 된다. 사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늘 싸가지가 있거나 예의가 바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싸가지 없다거나 예의 없다는 말은 늘 나이가 같거나 많은 사람이 나이가 같거나 적은 사람에게만 해야 하는지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 말을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한다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그 말을 한 어린 사람은 무조건 죄인이 된다.

 

‘윗사람’이 아니라 ‘더 어른’

사실, 존댓말을 들으며 우리가 진짜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상대보다 ‘윗사람’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더 어른’이라는 사실이다. 존댓말을 듣는 사람이 존댓말을 하는 사람보다 더 어른이라면 그만큼 더 어른스러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존댓말을 쓰는 상대는 존댓말을 통해 당신이 더 어른이니 더 어른스럽게 행동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당신에게 존댓말을 써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대가 당신보다 자신이 더 어른스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 상대의 말과 행동이 나보다 어른스럽지 못하다면 그것은 상대가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미성숙한 사람에게 왜 미성숙한 판단을 했냐고 따지는 일이야말로 미성숙한 일이니 반말을 들었다고 화를 낼 이유도 없다.

 

결국, 상대보다 더 어른스럽게 행동할 자신이 없다면 상대에게 반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또 같은 이유로 상대에게 존댓말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존댓말이란, 존댓말을 듣는 내가 존댓말을 하는 상대자보다 더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게 하기 위해 마련된 언어적 장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존댓말의 기능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존댓말과 반말로 빚어지는 갈등의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대화 상대자로부터 반말을 듣는 편이 더 속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존댓말을 들으며 상대보다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반말을 들으며 상대보다 덜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짐스럽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어 사용자들 모두가 존댓말의 기능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반말의 사용은 훨씬 축소될 것이고 존댓말의 사용은 훨씬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존댓말로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양한 계급이 존재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언어의 전통이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다면 언어를 바꾸어야 할까, 가치를 바꾸어야 할까?

 

 

 

글: 신지영(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