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맛의 말, 말의 맛 - 빵의 전쟁

튼씩이 2022. 12. 19. 13:00

성경이 바뀐다? 성경의 정확무오(正確無誤)함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펄쩍 뛸 일이긴 하지만 성경은 바뀐다. 오래전 이 땅의 초기 기독교인들이 봤던 성경과 오늘날의 성경이 조금 다르다. 또한 당대의 기독교인들이 보았던 우리말 성경은 번역되기 전의 외국어 성경과 내용이 조금 다르다. 여러 가지를 복잡하게 따질 필요 없이 성경에 나오는 먹을 것만 보아도 그렇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란 이름 속의 ‘보리떡 다섯 개’와 마태복음 속의 다음 구절이 그 예 중의 하나이다.

영어            Man shall not live on bread alone.

독일어       Der Mensch lebt nicht vom Brot allein.

프랑스어    que l'homme ne vivra pas seulement de pain.

 

일본어     人は パン だけで 生きるのではなく.

중국어     人活着,不是单靠食物.

한국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한국어 (≪새번역 성경≫)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는 보리 떡 다섯 개로 번역되었지만 영어 원문을 보면 ‘빵 다섯 덩이(five loaves of bread)’라고 되어 있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도 ‘떡’이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성경 모두를 뒤져 봐도 모두 ‘빵(bread, Brot, pain)’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빵이 아닌 떡을 먹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초기의 성경 번역자들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와 중국어 성경을 보면 당시 번역자들의 고민이 느껴진다. 일본에서는 ‘빵(パン)’으로 번역을 했는데 중국에서는 ‘먹을 것(食物)’으로 번역을 했다. 일찍부터 서양과 접촉을 해서 음식은 물론 말까지도 받아들인 상태였던 일본은 아무런 고민 없이 빵으로 번역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성경 원문의 맥락을 살펴 먹을 것으로 의역을 한 것이다.

문제는 180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다. 밀가루가 귀하다 보니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구워서 먹는 이 음식을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음식이 없으니 말도 당연히 없다. 따라서 번역자는 중국처럼 의역을 하거나 “사람이 밀을 가루로 빻아 반죽해서 부풀린 뒤 화덕에 구워 먹는 것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라고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자는 과감하게 ‘빵’을 ‘떡’으로 대체했다. 그러다 보니 오해도 생기게 된다. 우리에게 떡은 주식이 아니니 “떡으로만 살 것 아니오.”라는 구절이 그리 와닿지 않는다. 결국 ≪새번역 성경≫에서는 ‘떡’을 원문대로 ‘빵’으로 돌려놓는다. 번역의 과정에서, 그리고 1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성경의 내용이 바뀐 것이다.

 

쌀과 밥에 철저하게 기대고 살아온 우리에게 밀과 빵은 매우 낯선 재료이자 음식이다. 우리 땅에서 밀이 잘 자라지 않으니 재료 자체가 귀했고, 이를 재료로 한 음식은 더더욱 귀했다. 가루를 반죽해 증기를 올려 쪄 먹는 요리법은 있었으나 화덕에 구워 먹는 방법은 요리법은 보편화되지 않았으니 이런 음식과 그것을 부르는 말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서양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음식에 대한 기록이 간간이 발견된다. 17세기 초반에 조선에 귀화한 벨테브레이(박연) 일행이 ‘밀가루로 만든 마른 떡’을 먹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8세기 초반 연행사로 간 이들이 베이징에 거주하던 서양 사람들에게 초대되어 먹은 음식의 기록도 나온다. ‘직사각형으로 큼직하게 썬 떡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다’고 묘사된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카스텔라로 보인다. 1884년 손탁 여사가 러시아 공관 앞 중동구락부에서 빵을 선보이게 됐는데 그 모양이 소의 불알과 같다고 하여 ‘우랑(牛囊)떡’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떡’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그 음식, 그것이 유럽 쪽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두 갈래의 이름을 갖게 된다. 영어의 bread로 대표되는 것이 한 갈래고, 프랑스어의 pain으로 대표되는 것이 한 갈래다. 영어의 bread는 독일어의 Brot, 네덜란드어의 brood, 스웨덴어의 bröd,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의 brød와 사촌 간이다. 프랑스어의 pain은 스페인어의 pan, 이탈리아어의 pane, 포르투갈어의 pão와 사촌 간이다. 표기만 보고도 대충 예상이 되겠지만 동양 쪽으로 전해진 건 프랑스어와 그 사촌들의 말이다.

빵과 그 이름은 포르투갈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전해진다. 16세기 중엽 중국으로 가는 중에 표류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의 배가 일본의 규슈 남단에 도착하게 되면서 일본과 포르투갈의 교류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빵이다. 일본은 밀가루를 구워 만든 이 음식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어의 ‘pão’를 발음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 사람들의 귀에도 ‘pão’는 ‘팡’으로 들린다. 그리고 이 소리는 일본 글자로도 어느 정도 정확한 표기가 가능해서 ‘パン’으로 적는다. 이 음식과 이름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일본어 ‘パン’의 발음은 [팡]이고 한글로도 ‘팡’이라 적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말에 들어와서 묘한 변화를 겪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팡’이 ‘빵’과 경쟁을 하다가 결국 ‘빵’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pão’의 본래 발음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없다. ‘pão’의 ‘p’가 우리 귀에는 ‘ㅃ’에 가깝게 들리지만 당시의 사람들이 ‘パン’이 포르투갈어에서 왔으니 포르투갈어의 발음을 들어 본 후 ‘팡’을 ‘빵’으로 고쳐 적었을 리는 없다.

‘팡’이 ‘빵’으로 대체된 것은 소리나 표기의 생경함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말에서 ‘ㅍ, ㅌ, ㅋ, ㅊ’ 등의 거센소리와 ‘ㅃ, ㄸ, ㄲ, ㅆ, ㅉ’ 등의 된소리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거센소리는 꽤나 나중에 우리말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된소리는 그보다 더 뒤에 생겨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상대적으로 덜 쓰였고, 거센소리나 된소리로 시작되는 한 음절짜리 단어는 더더욱 귀하다. 결국 한 음절짜리 단어인 ‘팡’이나 ‘빵’ 아주 낯선 소리이자 표기다. ‘ㅃ’이 ‘ㅍ’보다 훨씬 더 늦게 생겼으니 ‘빵’이 더 생경할 만도 하다. 그런데 ‘팡’은 우리말에 거의 쓰이지 않는다. ‘팡’이 들어간 단어는 ‘곰팡이’, ‘암팡지다’ 정도만 확인된다. ‘팡’ 첫머리에 쓰인 것은 ‘곰팡이’와 같은 뜻인 ‘팡이’와 의성·의태어 정도다.

그러나 일본어의 ‘パン’ 발음이 우리 귀에 ‘팡’으로 들리기도 하고 ‘빵’으로 들리기도 한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포르투갈어와 마찬가지로 일본어에서도 ‘ㅍ’와 ‘ㅃ’는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의 귀에는 일본어의 ‘パ’는 단어의 첫머리에서 ‘ㅍ’나 ‘ㅃ’로 들린다. 그러니 ‘팡’이나 ‘빵’ 어느 것으로 쓰고 읽어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팡’과 ‘빵’이 함께 쓰이다가 점차 ‘빵’이 더 많이 쓰이게 되고, 해방 이후 ‘빵’으로 통일된 것이다. ‘팡’과 ‘빵’은 ‘ㅍ’과 ‘ㅃ’ 소리를 두고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는데 어느새 ‘ㅃ’ 소리가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의 성경에서 한때 ‘떡’이었던 것이 다시 제 자리를 찾고, 표기도 ‘빵’으로 굳어지기까지 참 많은 변화를 겪었다.

글자 ‘빵’을 유심히 쳐다본 사람은 알 것이다. 획도 많고, 복잡하고, 지면에 꽉 찬다. 사실 된소리가 포함된 모든 글자들이 그렇다. ‘꺾다’는 ‘ㄱ’이 위아래로 가득 차 있어서 낯설고, ‘섞다’와 ‘썩다’는 헷갈리기 일쑤다. 확실히 된소리가 포함된 말도 드물고 표기도 낯설다. 그래서인지 된소리로 된 새말이나, 말이 된소리로 바뀌어 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종종 있다. ‘장(長)’에서 유래한 말이 ‘짱’이 되고 ‘얼짱’이란 말로 확대돼 가는 것이 못마땅해 보이기도 한다. ‘세다’를 ‘쎄다’라고 하면 너무 격해 보이거나 상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말소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된소리는 말 그대로 ‘블루 오션(Blue Ocean)’이다. 뒤늦게 생겨난 소리들이기 때문에 이 소리가 포함된 단어가 극히 적다. 새로운 단어를 된소리를 이용해 만드는 것은 우리말에 있는 소리들의 활용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이전에 예사소리를 가진 단어들이 된소리로 바뀌어 가는 것은 ‘레드 오션(Red Ocean)’에 있던 단어들이 블루 오션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낯설다고 너무 못마땅하게 볼 필요는 없다. 변해 가는 것, 바뀌어 가는 것들은 모두 이유가 있다. 성경 속의 떡도 빵으로 바뀌었고, 우리의 밥상도 때론 ‘빵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말소리도, 그 표기도 그렇게 바뀐다.

 

 

글_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에서 일부를 추려 내어 다시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