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맛의 말, 말의 맛 - 귀화하는 과일들의 이름 전쟁

튼씩이 2023. 1. 25. 12:59

빨간 것은 원숭이 엉덩이, 맛있는 것은 사과, 긴 것은 기차, 빠른 것은 비행기, 높은 것은 백두산이다. 이렇게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어릴 적 즐겨 부르던 정체불명의 노래 때문이다. 결국은 ‘백두산 뻗어 내려 반도 삼천리’란 가사로 시작되는 <조선의 노래>를 부르기 위한 도입 정도가 될 텐데, 친숙한 것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해 나가는 그 만듦새가 재미있다. 그런데 사과와 기차 사이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 길쭉한 모습에 노랗고 향긋한 바나나가 그것이다. <조선의 노래> 도입부에 등장하는 과일이기는 하지만 바나나는 누가 봐도 외래종이다. 당연히 이름도 그렇다.

외국에서 무언가 들어오면 이름도 같이 들어온다. 과일이라고 다를 것이 없으니 종자가 들어올 때 그 이름도 같이 들어온다. 그 이름을 본래의 소리대로 쓰든, 새로이 짓든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이다. 과일인지 채소인지 헷갈리는 토마토도 그랬다. 토마토를 받아들인 중국에서는 생긴 것은 홍시와 비슷한데 서양에서 왔다고 해서 ‘서홍시(西紅柿)’라 이름을 붙였고 지금도 그렇게 쓰고 있다. 우리도 처음에는 감과 비슷하다 하여 ‘땅감’ 또는 ‘일년감’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번역해서 쓰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토마토’로 자리를 잡았다. 토마토 재배가 일제 강점기에 본격화된 듯한데 그 영향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 사람들은 영어의 발음대로 ‘トマト(토마토)’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따라 ‘도마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영어 발음에 익숙해지면서 본래의 발음에 가까운 ‘토마토’로 바뀌었고 지금은 다들 이렇게 부른다. 물 건너 들어온 이름이긴 하지만 이것을 바꾸자는 이들이나, 과거에 쓰던 ‘땅감’ 혹은 ‘일년감’을 되살려 쓰자는 이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토마토의 이름을 두고 한차례 물밑 전쟁이 벌어진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토마토 이름을 뭐라 정할 것인가에 대한 싸움이다. 처음에는 영어 이름대로 ‘체리 토마토(cherry tomato)’가 제시되었다. 크기나 모양이 체리와 비슷하니 영어권에서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체리는 우리에게는 낯선 과일이니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진다. 먼저 제시된 것은 ‘애기 토마토’다. 애기처럼 작고 귀여우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름은 예쁘지만 그것을 입에 넣고 톡 터트려 먹어야 하니 느낌이 영 개운치 않다.

결국 최종 승자는 ‘방울토마토’가 되었다. 크기도 모양도 딱 맞아떨어진다. 발음도 예쁘니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이름이다. ‘방울토마토’는 등장하자마자 곧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누가 이 이름을 처음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국어학자는 아닐 듯하다. 이것을 재배한 농부나 유통한 상인, 혹은 장을 보러 간 손님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이토록 정확하고도 예쁜 이름을 지어 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후에 등장한 조금 길쭉한 작은 토마토는 이름이 쉽게 지어지게 된다. 모양이 대추와 비슷하니 ‘대추 토마토’가 제시되고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방울토마토의 사례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키위에서는 실패를 맛보게 된다. ‘키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과일은 뉴질랜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나 원산지는 중국이다. 중국 남부에는 오래전부터 ‘양타오(楊桃)’라는 과일나무가 있었다. 한자의 뜻으로 가늠해 보면 ‘버드나무 복숭아’란 뜻인데, 과수원이나 농장에서 대규모로 키우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20세기 초의 뉴질랜드 사람이 그 씨를 뉴질랜드로 가져가게 되고 이것이 대량 재배에 성공하게 되어 해외에 수출되게 된다. 뉴질랜드에서 온 과일이니 미국의 장사꾼들이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새의 이름인 ‘키위(kiwi)’를 갖다 붙인 결과 이름이 이렇게 굳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키위와 비슷한 과일이 우리 땅에서도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었고 심지어 고려 가요 <청산별곡>에도 나온다. ‘머루와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란 구절의 ‘다래’가 그 주인공이다. 요즘도 산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키위보다 작은 크기에 표면에 털이 없는 것을 빼면 키위와 비슷하다. 키위와 다래가 본래 같은 종이니 키위가 우리 땅에 들어오게 됐을 때 ‘다래’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외국산 과일이란 걸 강조하고 싶었는지 그저 ‘키위’로 소개되고 그렇게 자리를 잡게 된다. 다른 나라 말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나름대로 분명한 사연이 있으니 굳이 뭐라 할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고유한 우리말로 외래어 ‘키위’를 대신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키위’에 ‘양다래, 큰다래, 참다래’ 등의 이름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다래’의 머리에 붙은 ‘양(洋)’은 서양에서 들여온 것에 흔히 붙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고, ‘큰’ 또한 크기 때문에 붙은 것이니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참’은 뜻이나 용법을 감안해 보면 영 마뜩하지 않다. 말 그대로 ‘진짜’란 뜻인데 과연 키위가 ‘진짜 다래’인지 의심스럽다. ‘참’이 동식물명에 붙으면 품질이 좋은 것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개량을 거듭한 재배 작물이 키위이니 마음을 열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이 기본이 되는 종을 가리키기도 하니 이런 뜻이라면 우리의 산에서 오랫동안 자라 온 다래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방울토마토의 이름이 지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키위의 이름이 변모되는 과정 역시 재배자나 판매자의 손을 거쳤을 가능성이 크다. 누구의 손을 거치든 언어 자체의 속성에 기초해 자연스럽게 생산과 수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장삿속으로 이름을 지었다면 그리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참’이란 것이 정해지면 나머지 것은 모두 ‘가짜’가 되어버리니 꽤나 위험한 작명이기도 하다. 우리의 산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온 다래가 진정한 ‘참다래’일 텐데 어느 날 물 건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형국이다.

키위와 다래는 사촌지간이니 키위가 갖가지 다래란 이름으로 둔갑을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다. 오랫동안 한자를 공유해 온 한국, 중국, 일본이 한자에 기반을 둔 어휘를 같이 쓰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각 나라마다 고유한 말과 한자어가 대립을 하다 한자어가 득세를 하는 것도 언중의 선택이라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무엇이 참과 거짓인지 모른 채 ‘참’을 주장하거나 의도적으로 ‘참’을 몰아내는 것은 옳지 않다.

맛있고도 긴 바나나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오늘날 우리가 사먹는 바나나는 한 종이다. 한 종일 뿐만 아니라 한 몸이다. 바나나는 뿌리를 잘라 심어 번식을 시키니 오늘날 지구상에서 재배되는 바나나는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이렇게 오로지 한 몸만 있다 보니 바이러스성 질환이 발생하면 모든 바나나가 몰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그로미셀이란 이름의 바나나가 몰살되었는데 오늘날의 캐번디시란 이름의 바나나도 그런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어려움을 감안해 보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말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한 종 한 몸인 바나나와 같은 운명은 아닐지라도 한 언어만 쓰는 인류가 문화적으로 그렇게 건강하게 살 것 같지는 않다. 지구상의 언어뿐만 아니라 한 언어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순수하고 고유한 말만 강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양한 요소들이 적당히 섞여야 오히려 건강하고 풍부한 말이 될 것이다. 다만 ‘참’이 아닌 것이 ‘참’을 밀어내는 상황은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 바나나는 길고, 우리말은 맛있을 것이다.

 

 

글_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에서 일부를 추려 내어 다시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