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친일파 처단 등 의열활동을 펼친 독립유공자, 이종암(1962년 독립장), 이강훈(1977년 독립장), 엄순봉(1963년 독립장) 선생을 〈2023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대구광역시 출생의 이종암(1896년) 선생은 1918년 2월 만주로 망명했다.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속성과정을 거쳐 1919년 10월 수료했고, 동창생들과 의기투합하여 의열단*을 11월에 창립했다.
*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무력독립운동단체로써 1920년대 일본 고관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을 펼침
선생은 국내로 밀입국해 최수봉(崔壽鳳, 호적명 최경학, 1963년 독립장)을 만나 폭탄 거사를 제의, 최수봉이 12월 27일 밀양경찰서로 진입해 거사를 성공시킨 뒤 1921년 12월 중국으로 탈출하여 북경의 의열단 본부에 합류했다. 또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경신참변 당시 육군대신)가 상해를 방문한 1922년 3월 28일, 황포탄 부두에서 의열단의 다나카 암살 거사에 참여했으나 실패한 뒤 탈출했다.
선생은 의열단 조직정비 때 최고지도부 격인 5인 ‘기밀부’의 일원이 되었고, 국내 투쟁을 위한 요원으로 뽑혀 1925년 7월 비밀리에 입국했다. 의열투쟁을 위해 경북 달성군에 은신하던 중 1925년 11월 5일 경북경찰부 소속 일제 경찰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경찰과 검사국에서 혹독한 신문을 당하였고, 살인미수,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등으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지병과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하여 1930년 5월 23일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되었으나, 일주일만인 5월 29일 친형 집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 이종암 선생 (『동아일보』1926년 12월 19일 기사), -왼쪽 / 이강훈 선생(공훈전자사료관)
강원도 김화군 출생의 이강훈(1903년) 선생은 1919년 3월 12일, 김화군 독립만세 시위 참여를 이유로 헌병들에게 붙잡혔다가 간신히 풀려났고, 이후 임시정부에 뜻을 품고 1920년 2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 1925년 북만주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군사위원장 김좌진(金佐鎭, 1962년 대한민국장)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귀국, 함경도를 순회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930년 4월 상해에서 유기석(柳基石)・유자명(柳子明) 등이 주도한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 비밀결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한 선생은 1931년 12월 중국인ㆍ일본인 무정부주의자들이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합작하여 창립한 ‘항일구국연맹’의 결성에도 참여하여 적극 활동했다.
선생은 주중(駐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육삼정(六三亭, 일본식 요리집)에서 중국 정부 요인과 은밀히 접선한다는 정보를 듣고, 아리요시를 암살하기 위한 육삼정 의거를 계획했으나 실패하였다.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끌려간 선생은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40년 일본의 대사령(大赦令) 등으로 1942년 7월 25일로 형기가 만기 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선생의 독립사상이 변함없음을 알고, 석방 대신 도쿄의 예방구금소로 이송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에 출옥한 선생은 12월에 귀국하여 백정기ㆍ윤봉길ㆍ이봉창 3의사의 주검 발굴과 봉환 문제를 임시정부 요인들과 상의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3의사의 주검을 모두 찾아내어 1946년 4월 주검을 모시고 귀국했으며, 선생과 국민들의 노력으로 7월 6일 합동 장례를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
▲ 엄순봉 의사 기적비(영양읍 호국공원) -왼쪽 / 3의사국민장행일광경 (『동아일보』1946년 7월 7일)
경상북도 영양군 출생의 엄순봉(1906년) 선생은 1925년 9월 남만주로 망명하였고, 안도현으로 이동하여 당시 한인학교 교사였던 이강훈 선생을 통해 북만주 해림(海林)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나 신민부(新民府)에 합류하였다. 이후 신민부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합작하여 조직한 한족총연합회 청년부 차장으로 활동했으며, 상해로 이동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항일구국연맹에도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선생은 육삼정 의거가 실패로 끝나자 안경근ㆍ오면직ㆍ이달ㆍ이용준 등과 함께 일본영사관 밀정인 이종홍을 처단하고, 독립운동에 방해물이 되는 옥관빈을 사살했으며, 1935년 봄 친일파 이용로를 처단한 끝에 중국 순경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영사관 경찰로 넘겨져 모진 고문을 받은 선생은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은 뒤,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38년 4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33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이종암ㆍ이강훈ㆍ엄순봉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희생정신으로 의열투쟁의 불꽃을 크게 피웠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종암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엄순봉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하였고, 이강훈 선생에게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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