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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백성이나 스님이 침향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이 오시기를 비는 뜻이었지요. 묻은 향나무가 수백 년이 지나면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된 뒤에는 ‘서해 바다에서 용이 솟아오르듯이’ 스스로 물위로 떠오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매향의식을 한 뒤엔 그곳에 매향비(埋香碑)를 세웠습니다.
그때 세웠던 매향비는 곳곳에 남아 있는데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의 보물 제614호 “매향비”도 있지요. 비는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써서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표면의 굴곡이 심합니다. 글자 크기가 같지 않고 가로세로도 잘 맞지 않으며, 글자 수 또한 각 행마다 같지 않지요. 다만 글자체에 예스러움이 담겨 있어 당시 지방의 글씨체를 엿볼 수 있습니다.
판독된 내용에 따르면, 고려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때에 불교 스님들을 중심으로 4,100여 명이 계(契)를 조직하여, 임금의 만수무강, 나라의 부강, 백성의 평안 등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매향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비문은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세워졌는데 건립목적과 세운 연대가 확실한 것으로, 잊힌 우리의 옛 민속을 알려주고 고려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지요. 민중들이 자신을 구원해주러 오실 미륵님을 기다리며 묻었던 향나무가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 최고급 향으로 알려진 침향(沈香)이 된 것은 어쩌면 이 백성의 염원이 이루어낸 결과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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