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 이영도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여덟째로 ‘소만(小滿)’이다. 소만이라고 한 것은 이 무렵에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차기[滿] 때문인데 이때는 이른 모내기를 하며, 여러 가지 밭작물을 심는다. 소만에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 먹고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는 것도 별미다.
이때 특별한 풍경은 온 천지가 푸르름으로 뒤덮이는 대신 대나무만큼은 ‘죽추(竹秋)’라 하여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다. “죽추(竹秋)”란 대나무가 새롭게 생기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느라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소만 때 겉으로 보기엔 온 세상이 가득 차고 풍족한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굶주림의 보릿고개 철인 것이다.
▲ 세상이 온통 푸르름으로 뒤덮이는 ‘소만(小滿)’ 무렵 대나무 잎은 “죽추(竹秋)”라 하여 누렇게 된다.
“보릿고개”를 한자로 쓴 “맥령(麥嶺)” 그리고 같은 뜻인 “춘기(春饑)”, “궁춘(窮春)”, “춘빈(春貧)”, “춘기(春飢)”, “춘기근(春飢饉)”, “춘궁(春窮)“, ”궁절(窮節)” 같은 여러 가지 말들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나왔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소만에서 망종까지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많았다. 지금 온 세상이 푸르름이 꽉 차 보이지만, 대나무 빛깔이 죽어가는 죽추의 계절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 이영도 시인은 그의 시 <보릿고개>에서 “보리누름 철은 / 해도 어이 이리 긴고 / 감꽃만 / 줍던 아이가 / 몰래 솥을 열어보네.”라고 노래한다. 배고픈 이때는 하루해가 길기만 하다. 먹을 게 없어 감꽃만 줍던 아이, 혹시나 하고 몰래 솥을 열어본단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따뜻함이 있으면 차가움도 있으며, 가득 차 있으면 빈 곳도 있다고 우리에게 세상 이치를 잘 가르쳐 주는 소만, 나는 배불러도 주변에 굶주린 이웃이 없나 돌아볼 때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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