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자채신. 이 생소한 성어와 마주쳤다. 글자를 풀면 이렇다. ‘아들에게 나무하는 법을 가르치다.’ 구미가 당겼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무를 해 오라고 시킨다. → 아들은 나무를 해 온다. → 아버지는 아들이 해 온 나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자신의 나무하는 법을 아들에게 가르친다. → 아들은 아버지의 나무하는 법을 따른다.
내 생각과는 달랐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턱대고 나무를 해 오라고 시키지는 않았다. 일단 묻는다. “집에서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해 오겠느냐, 아니면 백 리 떨어진 곳에서 해 오겠느냐?” 말할 것도 없이 집 가까운 곳에서 나무를 해 오겠다는 아들. 이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가까운 곳에서는 언제든지 해 올 수 있다. 백 리 떨어진 곳은 그렇지 않다. 그곳의 땔감부터 가져와야지 우리 집 근처의 땔감이 남아 있지 않겠느냐?”라고. 이 착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백 리 되는 곳으로 떠난다.
백 리라고? 백 리는 너무나 멀다. 십 리가 사 킬로미터이니 백 리는 사십 킬로미터.게다가 집으로 돌아와야 할 테니 도합 팔십 킬로미터다. 경부 고속도로 양재 나들목부터 용인 에버랜드까지가 사십 킬로미터가 안 된다. 그리고 아들이 가야 하는 그 길은 지금처럼 평탄한 길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르막도 있고, 야생 동물을 만날 수도 있고, 괴한에게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 어찌어찌해서 백 리를 걸어서 그곳에 갔다고 치자. 그런데 땔나무가 없다면 어쩔 것인가?
땔나무는 나만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곳에서 백 걸음 떨어진 곳에 사는 누군가가 땔감을 해 갔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들과 다른 방향에서 백 리를 걸어 나무를 베어 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다. 백 리를 걸어간 이 아들이 가련하니 땔나무를 하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래서 땔나무를 가지고 다시 백 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고 치자.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이 아들이 집 근처에 도달했을 때 집에서 백 걸음 떨어진 그곳의 나무가 베어진 광경과 마주하는 것을. 아들처럼 백 리를 걸어서 온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들네 근처에 사는 사람이 베어 간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땔나무는 나만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 성어의 뜻은 이렇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근본적인 처방에 힘쓰라.’ 동의할 수가 없다. 어떻게 백 리를 걸어 나무하는 게 ‘장기적인 안목’이고 ‘근본적인 처방’이란 말인가.
당나라의 임신사林愼思가 쓴 《속맹자續孟子》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아버지에 대해 생각한다. 단지 땔나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뜻이 있었던 게 아니겠느냐고. 이 이야기의 빈 데를 채워 줄 수 있는 다른 이야기가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기를 바란다.
교자채신敎子采薪 敎: 가르칠 교 子: 아들 자 採: 캘 채 薪: 땔나무 신 뜻풀이: 아들에게 나무하는 법을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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