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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 - 와다 하루키 외

튼씩이 2011. 8. 24. 14:25

 


일본 지식인의 ‘양심선언’

“한국 병합은 원천 무효


지난해는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지 100년째 되는 해였다. 일본 이와나미 서점이 간행하는 비판적 학술지 ‘사상(思想)’은 ‘한국 병합 100년을 묻다’라는 특집호를 내고 8월에 학술회의를 열어 논의를 한층 보완했다. 이 책은 그 학술회의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흔히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비판적 역사학자 16명이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미야지마 히로시(63·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가장 중요한 필자이자 이와나미 서점에 한국 병합과 관련한 특집호를 제안했던 인물이다. 그는 “병합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 문제에 대해 일본 국내의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에 주목하면서 “100년을 계기로 어떤 근본적 전기를 만들”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출발점이다.


미야지마는 책의 맨 앞에 수록한 논문에서 “일본이 스스로의 역사를 인식하는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주장한다. 이제껏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을 지배해온 ‘동아시아의 중심’이라는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한, 일본의 정당한 자기인식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일본사를 아시아의 주변부로 인식”해야 한국 병합을 바라보는 시야도 열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아직도 이런 자각이 거의 보이지 않거나, 종래의 패러다임을 약간 수정하는 것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주변이었다”는 미야지마의 역사 인식은 “일본이 유교 모델을 거부했다는 졈에 근거한다. 중국은 물론 조선과 베트남, 류큐에서조차 유교 모델의 의식적 수용이 진전됐지만 “일본만은 그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맞으면서 유교 모델에 대한 무관심이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그 지점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다. 메이지 시대의 탁월한 이데올로그였던 그는 “문명화의 최대 장해가 유교에 있다고 간주, 유교에 대한 혹닉(惑溺)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즉 “유교의 영향력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서양 문명을 수용하기란 불가능하며, 여전히 그 깊은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중국과 조선으로부터의 결별, 곧 탈아(脫亞)를 선언해 일본의 문명화를 설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에 미혹돼 정체에 빠진 한국’이라는 후쿠자와의 인식은 실제와 달랐다는 것이 미야지마의 판단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서 추진한 사법제도 개혁의 과정”을 거론하면서, 일본의 예상과 달리 “근대적 소유권과 매우 흡사한 토지 소유권이 이미 한국에 존재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몹시 지체돼 있어야 할 한국에서 근대적 소유권과 유사한 개념이 수백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은 “유교 모델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유교적 아시아를 부정하고 “서구 모델을 특권화”하는 후쿠자와의 근대화 패러다임은 후대의 정치사학자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에게로 이어진다. 전형적인 탈아론자인 그는 한국에 대해 또 다른 편견을 드러낸다. 그는 중국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빗물형’과 ‘홍수형’이라는 비유를 쓴다. 즉 “빗물형의 일본은 중국 문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에 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은 선택의 자유 없이 동화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야지마는 “(문화의 수용이란) 수용하는 측의 사회가 고도의 문화적 기반을 갖춰야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과거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인쇄술과 서적의 보급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그런 문화적 수준은 “15세기 일본에서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미야지마의 진단이다. 그는 “일본의 인식은 바로 그 탈아론적 관점에서 100년 동안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여전히 한국 병합의 강제성과 모순성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맺는다.


스다 츠토무(52·메이지대학 교수)는 “일본 민중이 왜 조선 멸시관을 갖게 됐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적어도 에도 시대에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태도다. 당시에는 오히려 조선과 조선인을 동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국에 대한 동경, 이문화에 대한 관심”이 일본 문화 곳곳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스다는 “에도 시대에 가장 대중적 오락”이었던 ‘조루리’를 그 멸시적 감정의 뿌리로 제시한다. 조루리는 악기 반주에 맞춰 이야기를 읊는 일본의 서민 예술이다. 한데 18세기 전반, 지카마츠 몬자에몬과 기노 가이온이라는 작가들이 조선과 조선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스다는 이 두 명의 인기작가에 의해 형성된 민중의 조선관이 18세기 후반까지 조루리와 가부키 등을 통해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결국 “일본의 무력에 굴복한 조선인상”이 “영향력이 큰 미디어를 통해” 일본 민중에게 자연스럽게 흡수됐으며, 그런 “멸시”와 “원한”의 확대 재생산이 근대 이후로까지 이어졌다는 분석을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책에는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심도 깊은 연구 결과도 등장한다. 이를테면 이노우에 가츠오(66·홋카이도대 명예교수)는 청일전쟁 당시 신식 라이플로 무장한 일본군이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살육한 사건을 추적한다. “총 4000명의 일본군이 동원”됐고 “동학농민군 사망자 수는 3만명을 훨씬 넘은 것이 확실하고 부상 후 사망자를 더하면 5만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이노우에는 “대본영의 가와카미 병참총감이 내린 이 ‘모조리 살육’ 명령에 조금의 정당성이라도 있었던 걸까?”라고 질문한다. 일본군이 “도리에 어긋난 섬멸 작전”을 펼친 까닭은 “중국 영토 내부로의 침공이라는 모험적 전략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일본 대본영이 이 작전의 전모는 은폐한 반면, 대륙 침공 작전을 자세한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이웃나라 정부의 주권과 민중의 생명을 유린한 사실을 불문에 부친 것”이라고 지적한다.


16명의 학자가 저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택해 “한국 병합의 의미”를 되짚은 이 책은 600쪽에 가깝다. 와다 하루키(73·도쿄대 명예교수)가 쓴 ‘한국 병합 100년과 일본인’은 순서상 두 번째 글로 자리했지만, 이 책의 최종적 결론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그는 1985년부터 최근까지 일본이 한국 병합을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집중한다. 그중에서도 의미있게 다뤄지는 것은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국회 답변과 노사카 고켄 관방장관의 발언이다. 요약하자면 “병합이 대한제국 황제와 조선 민족의 의사에 반해 힘에 의해 강제됐다”는 것이며, “(조선에) 고통을 가했으며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불충분하다는 것이 와다의 평가다. 게다가 무라야마 이후에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더 반동으로 회귀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그래서 그는 “1995년 발언을 더 진전시켜 명확하게 하고, 국가적 합의로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면서 “병합조약은 애초부터 무효였다고 지금 곧바로 인정할 것”을 주문한다. “보상 문제는 이러한 해석의 변경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미해결된 보상 문제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치적 결단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 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내놓은 선언이다.

- 경향신문 서평 -      

 

2011. 0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