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오례의 11

「16세기 무덤 출토복식」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2008년~2009년 남양주 별내 택지개발사업 터의 무연고 여성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모두 52건 71점 가운데 사료적 값어치가 있는 10건을 국가민속문화유산 「남양주 16세기 여성 무덤 출토복식」으로 지정하였다. 이번에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복식 유물은 16세기 중기 복식 연구 자료로서 값어치가 높으며, 당시의 복식과 장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직금사자흉배 운문단 접음단 치마’는 조선전기 연금사(撚金絲)*로 비단 바탕에 무늬를 짜 넣어 만든 사자흉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16세기 단령*이나 원삼* 등 남녀 예복용 포에 사용했던 옷감을 하의인 치마에 활용하였다는 사실이 처음 발견된 사례자, 해당 치마의 겉감을..

한층 친근해진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 캐릭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본부장 직무대리 신성희)는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과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 캐릭터 4종(수문장, 종사관, 갑사, 대졸)을 새롭게 개발했다. * 수문장: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사대문인 흥인지문, 숭례문 등 도성과 궁궐의 문을 지키던 책임자 * 종사관: 수문장을 보좌하고 관청의 업무를 수행하던 관직 * 갑사(甲士) : 조선 전기의 직업군인으로 중앙군의 정예병 * 대졸(隊卒) : 조선 시대에 오위(五衛) 가운데 용양위에 속한 중앙군으로 광화문을 경비하던 병사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조선시대 왕실 호위문화와 의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통문화 재현 행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병전(兵典)」의 기록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궁중 문헌을 ..

「남양주 여성 묘 출토복식」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예고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2008년~2009년 남양주 별내 택지개발사업 부지의 무연고 여성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모두 52건 71점 가운데 사료적 값어치가 있는 10건의 유물을 국가민속문화재 「남양주 16세기 여성 묘 출토복식」으로 지정 예고하였다. 이번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되는 복식 유물은 16세기 중기 복식 연구 자료로서 값어치가 높으며, 당시의 복식과 장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직금사자흉배 운문단 접음단 치마’는 조선전기 연금사(撚金絲)로 비단 바탕에 무늬를 짜 넣어 만든 사자흉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16세기 단령이나 원삼 등 남녀 예복용 포에 사용했던 옷감을 하의인 치마에 활용하였다는 사실이 처음 발견된 사례이자, 해당 치마..

(얼레빗 제4817호) 왜적, 종묘에서 많이 죽어 나가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5월 3일 치 기록에 보면 “경성이 함락되자 도검찰사 이양원 등이 도망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뒷부분에 보면 “이때 궁궐은 모두 불탔으므로 왜적 대장 평수가(平秀家)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宗廟)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놀라서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었다. 그래서 평수가는 할 수 없이 남별궁(南別宮, 소공동에 있던 태종의 딸 경정공주가 살던 궁)으로 옮겼다.”란 기록이 보입니다. ▲ 국보 '종묘' 전전 전경(문화재청 제공) 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으로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보면 ‘우사직 좌종묘(右社稷左宗..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 2 - 고조부모까지의 4대봉사, 그 숨겨진 진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제례문화의 바람직한 계승을 위해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라는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첫 번째 주제(제사상과 차례상)에 이어 두 번째는 “고조부모까지의 4대봉사, 그 숨겨진 진실”이다. 4대봉사는 절대적 규범인가? 조상제사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지낸다. 이것을 4대봉사라고 한다. 그런데 4대봉사가 절대적 규범은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누가, 누구의 제사를 지내는지를 법으로 규정해두었다. 1484년 성종 때 펴낸 조선시대의 법전 《경국대전》에는 “6품 이상의 관료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3대까지를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벼슬이 없는 서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 명시되어 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는 관직의..

세자의 공간, 동궁 (3) - 세자 신분의 특수성과 의례

3. 세자 신분의 특수성과 의례 세자는 차기 왕위계승자를 미리 책봉하여 왕권 계승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ʻ사왕嗣王ʼ으로 예정된 인물이다. 따라서 몇가지 특수한 신분적 특징을 갖게 된다.(이효석, 2005 참조) (1) 세자로 책봉되어 즉위하거나, 사망하거나, 폐위될 때까지 존재하는 임시적 존재로서, 항상 존재하는 신분이 아니라 특정 기간동안 존재한다. (2) 세자는 궁궐 내에서 독립적 영역으로 인식되는 동궁이라는 공간에서 생활한다. (3) 세자는 신하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왕을 대신하는 입장이기도 하여 군신관계 로 보면 양면성을 띤다. (4) 세자는 대개 궁궐 내의 다른 인물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다. 먼저, 세자의 재위기간이 연속적이 아니라 일시적이라는 점은 동궁이라는 공간이 항상 동일한 기능으..

조선의 세자 - 세자의 혼례

6. 세자의 혼례 세자의 혼례(婚禮)는 가례(嘉禮)에 포함된다.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로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 등의 의식 예법을 모두 뜻했다. 《주례(周禮)》에서도 ʻ이가례친만민(以嘉禮親萬民)ʼ이라 하여, 가례(嘉禮)가 만민(萬民)이 참여하여 행할 수 있는 의식임을 설명했다. 그만큼 가례는 상하 모두가 함께 행할 수 있는 의례였다. 가례의 분류에는 본래 조정의 통상적인 예제 등이 폭넓게 포함되지만, 현존하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등에서 사용되는 가례(嘉禮)는 왕실의 혼례에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본래 가례에 책례와 관례가 모두 포함되는 만큼 여기서는 ʻ왕세자의 혼례ʼ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궁중의 혼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조선의 세자 - 세자의 관례

5. 세자의 관례 관례(冠禮)는 성년식을 의미한다. 관례를 치르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에 관례라 했다.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서 계례(笄禮)라고 했다. 어린이와 성인은 머리모양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사대부가의 자녀인 경우, 결혼하기 전 15세~20세에 적절한 해의 정월에 날을 정해서 관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관례를 치르는 사람은 《효경(孝經)》이나 《논어(論語)》에 능통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익히고 있어야 했으며, 그 부모가 기년(1년) 이상의 상복이 없는 경우에만 거행할 수 있었다. 관례를 혼례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비록 미혼이더라도 관례를 마치면 성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성인이 되면 낮춤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으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남자는 자(字)를, 여자는..

조선의 세자 - 세자의 책례

4. 세자의 책례 세자 책봉의식은 국왕이 자신의 후계자를 공식화하여 조선 팔도에 알리는 중대한 행사였다. 행사의 의미가 컸던 만큼 의식도 복잡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책례의(冊禮儀)는 가례(嘉禮)에 속한 의례로서 왕세자ㆍ왕세손ㆍ왕세제나 왕비ㆍ세자빈 등을 책봉하는 의식이었다. 관례나 혼례 같은 일생의례와는 달리 국가의 종통을 세우는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예치국가의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특히 세자 책봉례는 책문(冊文)이나 교명문(敎命文)에 잘 나타나 있듯이 장차 천명에 의해 부여된 왕통과 교화를 책임질 군주로서의 지위를 계승할 권리를 세자에게 부여하는 의식이었다. 세자는 국가의 대본(大本)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 지위에 부합하는 의제(儀制)가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시..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세종과 운명적 조화를 이룬 신숙주

각종 언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세간에 나온 책 중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고 문장력이 좋아 22세 되던 해인 1439년(세종 21)에는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조정에 들어간 후 신숙주는 종종 장서각(藏書閣, 조선의 국가 사적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기관)에 들어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책을 찾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읽는 등 책을 남달리 사랑했다. 어느 날은 신숙주가 장서각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세종의 어의(御衣)가 그의 등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 신숙주의 학구열에 세종도 감동한 것이었다. 풍부한 독서량 덕분인지 신숙주는 언어 감각이 탁월했다. 그가 26세 되던 해인 144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