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18

<간토대학살> 101주년, 핏물에 젖어 떠내려간 사람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간토에 묻힌 사람은 누구   그 누구일까 그 누구일까   눈물에 젖어   핏물에 젖어   강물에 떠내려간 사람들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했네    아기가 죽고   어미가 죽고   아기가 죽고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아라카와강에 떠내려간 사람 영화 상영 중에 '이등병의 편지'를 작사ㆍ작곡하여 노래를 부른 가수 김현성의 구슬픈 노래 '너의 이름, 너의 얼굴'이 흘러나온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관동에 묻힌 사람은 눈물에 젖어, 핏물에 젖어, 강물에 떠내려간 사람들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했다고 울부짖는다. 1923 영화 곳곳에 나오는 주제가는 가수 김현성이 전부 작사작곡한 노래다. 김현성의  간토학살 음반이 곧 나올 예정이란다.시사회장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오열한다..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 기념우표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우리 역사 속엔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지지했던 외국인들 덕분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그 시절, 세계 곳곳을 다니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운 헐버트와 베델을 소개합니다. 호머 베잘렐 헐버트(1863~1949, 한국명 ‘헐벗’)는 1886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뒤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내한하자마자 한글의 우수성에 매료되었고, 1891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하였습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의 창간을 도왔고, 영문판의 편집인이었습니다. 헐버트는 1905년..

민족 계몽을 꿈꾼 ‘대한민보(大韓民報)’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대한제국(1897~1910) 시기는 근대의 희망과 아픔이 공존했던 시기였습니다. 침략적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 우리나라로 침탈해 들어오는 외세를 막아내기 위해 무력투쟁(武力鬪爭)을 비롯한 여러 자강(自强)과 계몽운동(啓蒙運動)을 각계각층에서 펼쳤으나, 끝내는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일제강점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에 근대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는 외세의 위협이 날로 늘어나는 때였기 때문에, 이때의 근대 문물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방편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신문(新聞)’입니다. 그렇게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1884)』였고, 그 후로 『한성주보(漢城週報, 1886~1888)』, 『독립신문(獨..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1)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서 영 희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 1. 황제국 선포의 배경 1897년 대한제국의 탄생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질서 관념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원래 제국(帝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이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치유신 이후 근대 일본이 이미 동아시아적 계층질서를 부인하고 ‘제국’을 칭했듯이 대한제국 또한 주권국가로서 중국(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의 의지를 제호(帝號)로써 천명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정운영의 면모를 일신하는 차원에서 칭제를 적극 추진했다. 칭제 상소에는 전․현직 관료층을 비롯하여 지방의 유학(幼學), 관학유..

순 한글 교과서를 만든 미국인, 호머 헐버트

1880년 초, 고종은 근대식 교육 기관과 영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근대식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갑신정변1)(甲申政變) 발발로 인해 다소 지연되었으나, 1886년에 최초의 근대식 국립 학교인 육영 공원이 개교하였다. 육영 공원의 교사로 초빙돼 조선 땅에 첫발을 디디게 된 미국인 호머 헐버트(H. B. Hulbert, 1863~1949)는 1891년까지 5년간 육영 공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근대 교육을 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도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는 등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다. 그 결과, 호머 헐버트는 내한 3년 만에 한국어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많은 외국인들 중 가장 특별한 길을 걸었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 안중근 의사마저 감탄을..

국어로 바라보기 - '국어'의 초석을 놓은 고종과 주시경

한글, 드디어 ‘국문’이 되다 1894년(고종 31) 11월 21일, 한글은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가 된다. 창제된 지 약 450년 만이다. 고종은 칙령을 내려 법률과 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漢文)으로 번역하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섞어서 쓸 것을 규정했다. 공문서를 기본적으로 한글로 작성하고 필요에 따라 한문 번역을 덧붙이거나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한글, 한문, 국한 혼용문의 세 가지로 작성하여 발표함으로써 한글 본위로 공문서를 작성한다는 원칙을 실행했다. 그동안 한글은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널리 쓰였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언문(諺文,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으로, 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규명해야

1923년 9월 1일 낮 11시, 일본 관동지방(도쿄도, 가나가와현, 사이타마, 군마, 도치기, 이바라기, 치바현)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이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이를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간토다이신사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관동대지진’이라 부른다. 문제는 이 대지진 때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관동지방에 체재하던 조선인들은 일제의 조직적인 ‘조선인 학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지진으로 혼란한 틈을 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명목으로 도쿄ㆍ가나가와ㆍ사이타마ㆍ치바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들은 ‘조선인 폭동’에 대한 전문(電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