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5

임시정부를 부정하면서 독립기념관장이 되다니

광복절이 지났습니다.광복은 1945년의 일이니 이제 79돌이 되었습니다.그런데 선조들에게 부끄럽게도 올해의 광복절은정부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회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치렀습니다.역사 이래로 이렇게 행사를 나뉘어서 치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 정부 기념식과는 따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치른 광복회의 광복절 기념식(광복회 제공)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치욕적인 35년의 식민 지배 세월을 보냈습니다.식민 통치를 일본처럼 혹독하고 잔인하게,언어까지 빼앗은 국가 말살 정책을 편 나라는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많은 독립투사가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헌신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지만우리의 독립을 불러온 것은 안타깝게도 독립군의 무장봉기가 아니라리틀보이와 팻맨으로 불리는 원자탄을 투하한 미국의 전쟁 승리 덕입니..

다테마쓰 판사, 감옥에서 박열 혼례식 올려줘

안재성 작가가 쓴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왜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일까요? 박열은 동경 유학 중 기존의 독립운동에서 더 나아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서 일왕 체제를 부정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1923년 9월 5일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0월까지 22년 동안 긴긴 옥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왕을 암살하려고 폭탄을 구입하려는 등 일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온한 투사였기에 작가는 박열에게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 안재성, 인문서원 알고 봤더니 박열 혁명가는 제 고등학교 대선배님이시네요. 고교 시절 박열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일본 군대를 환송하는 정류장에서 ‘일본 만세(萬歲)!’라고 외쳐야 할 것을..

오늘은 김지섭 지사가 일왕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날

“나는 결심과 각오가 있어서 한 일이니까 지금 와서 아무 할 말이 없다. 변호사의 변호도 나는 받지 않을 예정이다” -도쿄 일왕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뒤 재판에서 한 김지섭 의사의 말- 1924년 1월 5일, 김지섭 의사(1884.7.21. ~ 1928.2.20.)는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사는 황거 앞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왕궁을 향해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김지섭 의사는 일제 경찰에 잡혀 투옥되었을 때도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라며 당당히 일제를 꾸짖었다. ▲ 김지섭 지사 경북 안동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난 추강(秋岡) 김지섭 의사는 반평생을 민족의 해방을 위한 의열투쟁에 헌신..

(얼레빗 4619호) 일제강점기 신불출, '왜' 자를 없애자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어나 볼까 에헤야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1930년 신불출(申不出, 1905~?)이 작사한 '노들강변'입니다. 문호월 작곡, 박부용 노래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 우리 음악사에 불멸의 민요곡으로 자리 잡은 노래지요. '노들강변'은 오케레코드사에서 음반으로도 제작됐는데 신불출은 원래 만담가로 더욱 유명합니다. 일제강점기에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지요. 신불출은 특유의 화술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일제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면서 툭하면 경찰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인기 높던 그의 음반은 자주 불온작품으로 걸려 판매금지를 당했습니다. ▲ 으뜸 만담가 ‘신불출’과 그의 만담집 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