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10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살인자 인조

박경민 작가의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를 보면서, 무능하고 비겁한 고종에 화가 많이 났었는데, 그러다 보니 또 하나의 무능한 임금 인조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조를 다시 생각하다 보니 인조는 단순한 무능한 임금이 아니라, 살인자로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너무 과격하다고요? 왜 제가 그런 과한 생각까지 하는지, 잠깐 얘기해 보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임금입니다. 인조는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전면 바꿨습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잘 펼쳤음에 반하여 인조는 청나라는 오랑캐 나라라고 오로지 명나라에만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청나라가 좋아서 균형외교를 펼쳤겠습니까? 당시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얼레빗 제4770호) 병자호란 때 남평조씨가 쓴 3년 10개월 일기

“초경(初更, 초저녁)쯤 되어서 귀신(鬼神)이 나왔다고 소동이 벌어져 온 마을이 진동(振動)하니 허무한 일이다. 고을로부터 포 쏘는 소리와 두드리는 소리가 일각(一刻, 15분)이나 계속하여 온 마을이 소동하니 밤이 새도록 두렵고 무서우나 흔적이 없는 일이다.” 이는 370년 전 남평조씨라는 한 여성이 쓴 《병자일기(丙子日記)》의 정축년 7월 28일 기록으로 귀신 소동이 난 얘기입니다. ▲ 남평조씨가 병자호란 때 3년 10개월 동안 쓴 《병자일기(丙子日記)》,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제공) 이 일기에는 남평조씨가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당하여 피난길에서 가족을 잃고 찾아다닌 이야기는 물론 종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힘들지만 꿋꿋하게 살림을 꾸려간 이야기, 이웃집에 불이 나거나 도..

남한산성의 치욕, 못난 역사를 기록하다

못난 역사도 역사다. 우리 역사에는 영광에 가득 찬, 빛나는 업적을 세운, 후세에 자랑스럽게 전할 만한 역사만 있는 건 아니다. 못난 모습도 많았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 적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서로 분열하며 탁상공론만 거듭하던 모습, 그리고 마침내 적에게 굴욕스러운 항복을 하는 모습까지. 이 모든 장면을 합친 역사가 병자호란이다. 1636년 병자년, 12월 겨울부터 약 두 달 동안 이어진 전쟁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60만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고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본래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적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다가오자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책, 《남한산성의 눈물》은 이때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공조참의 나만갑(羅萬甲)이 남한산성..

(얼레빗 제4757호) 실학자 유형원이 쓴 개혁교과서 《반계수록》

‘개혁’은 한자로 ‘改革’이라고 쓰는데 여기서 ‘개(改)’는 고친다는 뜻이고, ‘혁(革)’은 가죽을 나타냅니다. 고대에 가죽은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의 계급과 신분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계급이나 신분이 바뀐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뜻이고 지금은 ‘개혁’이라 하면 낡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바꾸는 일을 말하지요. 지금으로부터 352년 전인 1670년 조선 중기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완성하고 1770년 경상감영에서 펴낸 《반계수록(磻溪隨錄)》은 그야말로 개혁교과서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때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일어나고 삼정(三政) 곧 나라 재정의 바탕을 이루었던 전정(田政)·군정..

통신사행 여정의 기록, 사로승구도

는 1748년(영조24), 조선의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부터 일본의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모두 30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장면에는 통신사행의 여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명승지와 사행 중 겪은 인상적인 순간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18세기 조선,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다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받아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큰 전쟁을 치르며 많은 고난을 겪었던 조선은 18세기에 이르러 점차 평화와 안정을 되찾으며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사행단을 파견하며 활발한 대외교류 활동을 펼쳤습니다. 조선의 외교사절단들은 몇 달에 걸쳐..

(얼레빗 제4727호) ‘속량문기’, 이제는 노비가 아니다

"이놈 놀보야, 옛 상전을 모르느냐? 네 할아비 덜렁쇠, 네 할미 허튼덕이, 네 아비 껄덕놈이, 네 어미 허천례, 다 모두 우리집 종이라. 병자 팔월 일에 과거 보러 서울 가고, 댁 사랑이 비었을 때 성질이 흉악한 네 아비놈이 가산 모두 도적하여 부지거처 도망하니 여러 해를 탐지하되, 종적 아직 모르더니 조선 왔던 제비 편에 자세히 들어보니 너희 놈들 이곳에 있어 부자로 산다기로, 불원천리하고 나왔으니 네 처자, 네 세간을 박통 속에 급히 담아 강남 가서 고공살이(머슴살이)를 하라." 이는 판소리 흥보가 신재효본 사설 일부입니다. 여기서 놀부가 박을 타자 그 안에서 놀부의 옛 상전이 나와 하는 말이지요. 이 말에 따르면 놀부 아비가 상전의 집 재산을 모두 훔쳐 도망쳤습니다. 이때 놀부는 어쩔 수 없이 아..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1), 어보

1) 어보 어보(御寶)는 국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말한다. 왕세자 시절에 받는 은인(銀印)과 국왕 시절에 받는 금보(金寶)가 있다. 국왕의 새로운 이름이 정해지면 이를 기록한 어보와 어책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국왕이 새로운 이름(존호, 묘호, 시호, 전호, 능호)을 받을 때마다 어보는 새롭게 만들어졌다. 국왕이 왕세자를 책봉할 때 교명(敎命), 죽책(竹冊)과 은인(銀印)을 내렸다. 왕세자의 은인에는 ‘왕세자인(王世子印)’이라 새겼다. 왕세자인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때는 대리청정을 할 때이다.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 왕세자의 명령서나 관리 임명장에 이 은인이 찍혔다.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을 때 받는 책봉인도 어보에 해당한다.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 새겨진 책봉인은 중요한..

(얼레빗 4591호) 북벌은 실패했지만, 대동법을 시행했던 효종

청강(淸江)에 비 듣는 소리 그 무엇이 우습건대 만산홍록(滿山紅綠)이 휘드르며 웃는구나. 두어라 춘풍(春風)이 몇 날이리 웃을 대로 웃어라. 위 한시는 조선의 제17대 임금 효종(孝宗, 1619-1659)의 칠언절구입니다. 초장에서 맑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봄비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 웃고 있다고 합니다. 중장에서 웃는 것은 온 산에 붉고 푸르게 피어나는 꽃과 잎들이라고 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과 잎들이 마치 사람처럼 봄비를 반기며 웃고 있다는 것이지요. 종장에서 따뜻한 봄바람이 얼마나 가겠느냐며, 꽃과 잎들이 봄날을 마음껏 즐기도록 놓아두라고 합니다. 효종의 여유 있는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 경기도 여주에 있는 17대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무덤 영릉(寧陵) 효종은 병자호란이 나자 강화에 피난했..

(얼레빗 4215호) 김만중 어머니 과부 윤씨의 자식들 가르치기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로 장희빈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그 김만중은 또 다른 고대소설 《구운몽(九雲夢)》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한글본과 한문본이 모두 전하는 《구운몽》은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

10월 30일 - 율곡의 <성학집요>는 무엇에 관한 책일까요

이이(李珥, 호는 율곡 1536~1584)는 어머니가 사임당 신 씨이며, 호조·이조·형조·병조판서를 지낸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입니다. 선조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시무육조를 지어 바치고, 왜적에 침입을 대비하도록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 등 개혁안을 주장했고, 동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