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 4

(얼레빗 제5003호) 영조임금, 고기인 줄 모르고 먹었다가 토해

“오늘은 선의 왕후(宣懿王后, 조선 20대 경종의 계비) 기일(忌日)’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아침 수라에 고기붙이로 만든 반찬이 있었는데, 눈이 침침하였기 때문에 분별하지 못하고 집어 먹었다가 토했었다.” 이는 《영조실록》 47년(1771) 6월 29일 자에 있는 기록입니다. 이를 보면 영조임금은 육고기를 싫어했음은 물론 과식을 피하고 매일 아침을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조임금은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임금이기도 했지만,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던 일 곧 “감선(減膳)”을 89차례나 했을 정도로 임금으로 해야 할 처신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감선은 권력 사이에서 신하들을 경고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감선이 아니라 아예 굶는..

영조대 왕실의 식생활 - 장수한 영조가 즐겼던 음식들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진 숙빈(淑嬪) 최씨(崔氏, 1670~1718)이다. 아버지 숙종은 첫 왕비와 계비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훗날의 희빈(禧嬪, 1659~1701)이 된 나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경종(景宗, 1688~1724)을 낳았다. 그 후 숙종은 희빈에게 불만을 느꼈고, 그즈음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얻기 시작했다. 이런 정국 속에서 영조는 1694년(숙종 20) 음력 9월 13일 새벽에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연잉군 (延礽君)에 봉해진 영조는 커가면서 왕실에서 본인이 처한 위태로운 위치를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연잉군은 몇 차례 잘못된 행동 때문에 숙종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눈 밖에 났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 사후에 소론의 지원을 받은 경..

제주도의 도시락, 약돌기 속 동고량

제주도의 도시락, 약돌기 속 동고량 우리는 1960~1970년대만 해도 양은도시락에 밥을 싸가지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러나 예전 사람들에게는 양은도시락이 있을 턱이 없지요.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일하러 갈 때 ‘동고량’이라 부르는 밥을 담은 고리짝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특히 소와 말을 돌보는 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지요. 이 동고량은 조그맣고 예쁘게 만든 것이고, 조금 큰 것은 ‘설기’라고 불렀습니다. 지역에 따라 ‘동고령’, ‘동고리’, ‘밥당석’, ‘방장석’, ‘밥차반지’, ‘밥장석’이라고도 했습니다. 동고량은 옷을 담아 보관하거나 짊어지고 옮기는 데 썼던 네모다란 ‘고리’에서 모양을 따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처럼 날씨가 무더운 곳에서 물기가 많고 변하기 쉬운 ..

(얼레빗 4624호) 하지, 양기가 고개 숙이기 시작하는 날

“도롱이 접사리며 삿갓은 몇 벌인고 모찌기는 자네 하소 모심기는 내가 함세 들깨 모 담뱃 모는 머슴아이 맡아 내고 가지 모 고추 모는 아기 딸이 하려니와 맨드라미 봉선화는 내 사천 너무 마라 아기 어멈 방아 찧어 들 바라지 점심 하소 보리밥 찬국에 고추장 상추쌈을 식구들 헤아리되 넉넉히 능을 두소” 위는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가운데 5월령 일부로 이 음력 오월 망종ㆍ하지 무렵 농촌 정경을 맛깔스럽게 묘사했습니다. “모찌기는 자네 하소 모심기는 내가 함세 / 들깨 모 담뱃 모는 머슴아이 맡아 내고”라며 모내기에 바쁜 모습을 그려내고, “보리밥 찬국에 고추장 상추쌈을 식구들 헤아리되 넉넉히 능을 두소”라며 맛있는 점심이야기를 노래합니다. ▲ 예전엔 하지 때까지 모내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