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상절 9

(얼레빗 제5070호) 세조, 한문책 《잠서》를 한글로 뒤치게 하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항(崔恒), 우승지(右承旨) 한계희(韓繼禧) 등 문신(文臣) 30여 인에게 명하여, 언자(諺字) 곧 한글을 써서 잠서(蠶書)를 뒤치게 하였다.” 이는 《세조실록》 23권, 세조 7년(1461년) 3월 14일 기록으로 세조 임금이 한문으로 된 잠서(蠶書)를 한글로 뒤치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 , 조선시대, 종이, 세로: 186.5cm, 가로: 131.8cm, 국립고궁박물관 는 중국 청나라 때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당견(唐甄, 1630∼1704)이 정치ㆍ경제 따위에 관하여 적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당견은 ‘진(秦)나라 때 이래 역대 제왕은 모두 도둑’이라고 했을 정도로 봉건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경제에 대해서는 은의 사용을 금지할 것과 빈부 격차를 비판하는 내용이 기술되..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 직지, 50년 만 프랑스서 공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요절,직지)이 프랑스에서 50년 만에 대중에 공개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과 협력해 직지와 한국불교의 인쇄 문화유산을 다루는 컨퍼런스를 오는 13일 문화원 오디토리움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는 오는 12일부터 7월 16일까지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열리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를 통해 공개한다. 특히, 직지는 1973년 '동양의 보물' 전시에서 소개한 이후 50년 만에 대중에 공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문화원은 이번 전시와 연계해 직지를 비롯해 한국불교의 인쇄 문화유산의 가치와 위상을 알리는 직지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8, 훈민정음 창제 그 이후의 훈민정음 역사

1446년 9월 10일 훈민정음을 반포하자마자 세종대왕은 이를 공식적으로 사용합니다. 10월 10일에는 신하들의 죄목을 직접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냈으며 다른 궁내 공문을 언문으로 작성하여 훈민정음의 사용을 널리 알렸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과거시험에 언문을 포함하도록 하여 훈민정음을 모르면 출세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언문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언문은 훈민정음을 비하하여 쓰던 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쓰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종은 첫째 아들 문종과 둘째 수양대군, 그리고 정의공주를 훈민정음 창제 과제에 깊이 참여시켜 훈민정음이 자연스럽게 후대로 넘어가도록 포석을 깔아 두었습니다. 창제 후인 1..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5,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

세종대왕은 그야말로 하늘이 낸 사람이었습니다. 세종임금 때의 일을 기록한 《세종실록》의 분량은 전체 조선왕조실록의 10분의 1을 차지하며 현재 400쪽짜리 40권으로 번역되어 있다고 하니 세종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업적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는 다른 모든 일을 합한 것보다 더 크고 더 중요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해석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온갖 환난을 이기고 세계 유수의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것은 세종대왕이 닦아 놓은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글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이끌어갈 원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같이 위대한 훈민정음의 창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전번 네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 조상들이 1만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살면..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4, 훈민정음이 나오기까지 우리 겨레의 노력

우리는 매일 한글의 덕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참 좋은 글자구나 하고 느끼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큽니다. 그러나 혹 외국인이라도 만나면 한글을 누가 어떻게 해서 만들었는지, 글자로서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소리를 표기하는 원리는 무엇인지 등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직접 서문을 쓴 《훈민정음해례》라는 책이 있어 이런 문제가 없는데 한글에 관해서는 마땅한 책도 없습니다. 앞에서 인류가 5,500년 동안 문자를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지를 보았는데 이 글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어떤 문자생활을 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훌륭한 훈민정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2만 년 전에 정점을 찍고 그 뒤 1만 년 동안 온도가 차차 회복되었다고 합..

도서관 속 옛글을 찾아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이 가득한 서강대학교 로욜라도서관 1관 4층. 이곳의 한쪽 구석에는 ‘고서실’이라고 쓰인 작은 문이 있다. 중요한 자료들이 보관된 고서실에 일반 학부생이 출입하는 것은 원칙상 금지되어 있어 정확히 어떤 자료들이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없지만, 고서실 문 옆을 장식한 커다란 유리 간판은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기록 하나를 보여 준다. 바로 1459년 간행된 한글 고서이자 보물 745-1호인 『월인석보』 권1~2다. 서강대학교 로욜라도서관 내 『월인석보』 권 1~2 안내 간판. 『월인석보』는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으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각각의 제목을 따 『월인석보』라 일컫는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즉 그..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을 널리 알린 세조

세종대왕이 아낀 아들, 수양대군 세종(조선 제4대 임금)에게는 소헌왕후를 포함해 총 6명의 부인이 있었다. 왕후와 후궁을 통해 낳은 자녀는 모두 18남 4녀였는데, 그중 능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알려진 자녀는 소헌왕후가 낳은 맏아들 문종(조선 제5대 임금)과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었다.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훗날의 세조로, 조선 제7대 임금이 된다. 그는 대군 시절부터 왕위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못했는데, 스스로 ‘왕이 될 만하다’고 느낄 만큼 재능이 특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는 물론, 역법, 병서에도 두루 통달했고, 풍수 또한 전문가 수준으로 실로 당대의 어떤 문사에게도 뒤지지 않을 학문적 소양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또 문인 자질보다 무인 자질이 더 뛰..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운 정의(貞懿)공주

정의공주의 생애 세종 때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특히 가족으로 세종을 도운 부인 소헌(昭憲)왕후와 딸 정의공주(1415년 ~ 1477)가 있다. 세종은 딸 2명과 아들 8명을 두었다. 맏딸 정소(貞昭) 공주와 맏아들 이향(李珦, 문종)에 이어 둘째 딸 정의 공주다. 세종은 그 밖에 아들 7이 더 있다. 정의공주는 세종 즉위 전에 출생하였다고 하나 다만 오빠 문종(文宗)과 동생 세조(世祖) 사이에 태어난 사실에 비추어 태종 15년(1415)~16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세종 10년(1428)에 정의공주에 봉해졌고, 안맹담(安孟聃)과 가례를 치렀다. 안맹담은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그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다. 이후 안맹담은 계유정난에 협조하여 성록대부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