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실록 7

(얼레빗 제5051호) 조선시대 외국어 학습서, 노걸대⋅첩해신어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큰 나라를 대하는 데 있어 먼저 처리해야 할 요긴한 일이지만 책이 드물어 학자가 쉽게 얻어 보지 못하니, 청컨대 우선 《박통사(朴通事)》와 《노걸대(老乞大)》를 각각 1벌씩 황해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보내어 판각하게 하고, 교서관(校書館)에 보내어 찍어서 널리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는 《세조실록》 세조 4년(1458년) 1월 19일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외교관의 한 사람인 역관이 있어서 외국과 교역하고 소통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에서는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가르쳤고 외국어 학습교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 4년 당시 외국어를 가르치는 책이 드물어 이에 대한 대책을 낸 모양입니..

(얼레빗 제4918호) 명나라 황제가 달라고 한 닥종이

“정조사(正朝使) 유수강(柳守剛)이 먼저 통사(通事)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희고 두꺼운 닥지[白厚楮紙]를 구합니다.’ 하니, 조지소(造紙所, 조선 시대, 종이 뜨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보내어 준비하게 하였다.” 이는 세조실록 30권, 《세조실록》 9년(1463년) 2월 19일 치에 보이는 것으로 명나라 황제가 희고 두꺼운 닥지를 요청했다는 기록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 중국인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우리 종이를 ‘계림지(鷄林紙)’라 불렀고, 이후 ‘고려지(高麗紙)’, ‘조선지(朝鮮紙)’라고 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송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고려나 조선 사신들이 들고 가는 선물에 ‘종이’가 있었다는 데서 우리 종이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때 중국 사람들은 우리 종이를 ..

(얼레빗 제4887호) 세조와 이순신, 바둑을 좋아했다

“물거윤(勿巨尹) 이철(李徹)이 죽었다. (가운데 줄임) 철은 진을 치는 법에 밝고, 장기와 바둑[博奕ㆍ박혁]을 잘 두었으며, 젊어서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을 도모(圖謀)하는 것에 능하여 눈에 들더니, 마침내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항상 대궐에서 거처하였다. 그가 죽자 염빈(주검에 수의를 입혀 관에 넣어 안치함) 하는 것을 곧바로 하지 말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시 살아나기를 바람에서였다.” 이는 《세조실록》 세조 13년(1467년) 2월 11일 기록입니다. 이를 보면 세조는 바둑을 무척 좋아했음이 드러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바둑을 한자말로 ‘박혁(博奕)’ 또는 ‘기(碁)’라고 표현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수사, 충청수사, 장흥부사 등과 바둑을 두었다는 《난중일기》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 장군도..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을 널리 알린 세조

세종대왕이 아낀 아들, 수양대군 세종(조선 제4대 임금)에게는 소헌왕후를 포함해 총 6명의 부인이 있었다. 왕후와 후궁을 통해 낳은 자녀는 모두 18남 4녀였는데, 그중 능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알려진 자녀는 소헌왕후가 낳은 맏아들 문종(조선 제5대 임금)과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었다.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훗날의 세조로, 조선 제7대 임금이 된다. 그는 대군 시절부터 왕위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못했는데, 스스로 ‘왕이 될 만하다’고 느낄 만큼 재능이 특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는 물론, 역법, 병서에도 두루 통달했고, 풍수 또한 전문가 수준으로 실로 당대의 어떤 문사에게도 뒤지지 않을 학문적 소양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또 문인 자질보다 무인 자질이 더 뛰..

수양대군과 춤추는 학

수양대군과 춤추는 학 어느 날 안평대군 이용 · 임영대군 이구와 더불어 향금(鄕琴)을 타라고 명하였는데, 세조는 배우지 않았으나 안평대군 용이 능히 따라가지 못하니 세종과 문종이 크게 웃었다. (……) 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笛)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학(鶴)이 날아와 뜰 가운데에서 춤을 추니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의 나이가 바야흐로 어렸는데도 이를 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 - 『세조실록』 총서 세 번째 기사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1417∼1468년, 재위 1455∼1468년)를 후세 사람들은 곱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으로 본다면 업적도 적지 않았지요. 특히 세조는 훈민정음이 자리를 잡는 데 ..

‘징분질욕’ 네 글자를 써서 곁에 붙여둔 강석덕

‘징분질욕’ 네 글자를 써서 곁에 붙여둔 강석덕 강석덕은 성품이 청렴하고 강개(慷慨)하고 고매(高邁)하며, 옛 것을 좋아하였다. 과부(寡婦)가 된 어미를 섬겨서 지극히 효도했으며, 배다른 형제(兄弟)를 대우하여 그 화목을 극진히 하였다. (……)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생각할 적엔 다스리는 방법이 매우 주밀(周密)했으며, 집에 있을 때는 좌우(左右)에 책을 두고는 향(香)불을 피우고 단정히 앉았으니, 고요하고 평안하여 영예를 구함이 없었다. 손수 ‘징분질욕(懲忿窒慾)’이란 네 개의 큰 글자를 써서 좌석의 곁에 붙여두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세조실록』 5년(1459년) 9월 10일 기사에 나오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의 졸기(卒記)입니다. ‘졸기’란 죽은 인..

(얼레빗 4206호) 조선전기의 동국지도, 조선후기의 동국지도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척(鄭陟)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 등이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바쳤다. 이보다 앞서 정척과 양성지 등에게 명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모여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상고하여 확정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