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연문장전산고 10

(얼레빗 제4863호) 오늘은 찬 이슬 맺히는 절기 '한로'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7째 절기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의 한로(寒露)입니다. 한로 무렵은 기온이 더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가을걷이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이때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쉬는 새참에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 맛은 농부들에게 있어 행복이며 또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함께 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가을 들판에는 콤바인이 굉음을 울리며 논을 누비면서 타작과 동시에 나락을 가마니에 담아내고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에 한가롭게 길가는 나그네도 볼 수가 없어 예전처럼 막걸리 한잔을 나누거나 논둑에 앉아서 새참 먹는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지요. ▲ 한로 무렵..

(얼레빗 제4816호) 김만중 《구운몽》, 사대부가 여성들에게 인기

“전(前) 판서 김만중이 남해(南海)의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는데, 나이는 56살이었다. 사람됨이 청렴하게 행동하고 마음이 온화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 벼슬을 하면서는 언론이 강직하여 선(善)이 위축되고 악(惡)이 신장하게 될 때마다 더욱 정직이 드러나 청렴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고, 벼슬이 높은 품계(品階)에 이르렀지만 가난하고 검소함이 유생(儒生)과 같았다. 왕비(王妃)의 근친(近親)이었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경계하여 권세있는 요로(要路)를 피하여 멀리했고, 양전(兩銓) 곧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그리고 대제학을 극구 사양하고 제수받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대단하게 여겼었다.” ▲ 서포 김만중 영정(대전시 문화재자료 제48호, 대전역사박물관 소장-왼쪽), 김만중의 《구운몽(九雲..

(얼레빗 제4804호) 겨레문화의 자부심 이수광의 《지봉유설》

조선시대에는 백과사전으로 볼 수 있는 책들이 여럿 있습니다. 먼저 영조 임금의 명으로 펴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지봉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성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오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풍석 서유구(徐有,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같은 책들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1614년에 펴낸 책으로 우리나라 첫 문화백과사전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 《지봉유설(芝峯類說)》 2책(권3~4), 성호박물관 / 《지봉유설》(권8), 교과서박물관 이 《지봉유설》의 폭넓은 지식을 보면 권 2의 〈외국조〉에 섬라(暹羅, 태국), 진랍국(眞臘國, 캄보디아), 방갈자(榜葛刺..

‘윷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새 종목 지정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윷놀이’를 신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윷놀이’는 양편으로 나뉘어 윷가락 4개를 던져, 윷가락이 엎어지고 젖혀진 상태에 따라 윷판의 모든 말을 목적지에 먼저 도달시키는 편이 이기는 놀이로, 정초(正初)부터 정월대보름까지 가족과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승ㆍ유지되어 왔다. 또한, 산업화ㆍ도시화로 급격히 무너지는 사회변화에도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단절 없이 지금까지 우리 겨레의 정체성과 값어치를 담은 대표적인 전통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해왔다. ▲ "모야, 윷이야!" 신나는 추임새문화 윷놀이(그림 이무성 작가) 역사문헌에서 ‘윷’의 유래와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문헌에서는 윷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윷을 ‘저포(樗蒲)’와 같은 ..

한글 위인 열전 - 한글로 소설 쓰는 사대부, 김만중

한글 문학을 사랑한 김만중 조선 후기 문신인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한문학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던 당대 통념을 거부하고 ‘국문 소설’을 썼다. 한문을 떠받들던 당대 사대부들 속에서 그는 어떻게 한글로 소설을 쓸 생각을 했을까? 김만중은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 호란(1637년)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면서, 형 김만기와 함께 홀어머니 윤씨 부인 슬하에서 성장했다. 윤씨 부인은 이조 참판 윤지(遲)의 딸로 명문가 출신답게 궁색한 살림 속에서도 아들들이 읽을 각종 서책을 구했고, 이웃의 홍문관 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 손수 베껴 옮겨서 교본을 만드는 등 자식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또 집안 대대로 전해 오는 학문을 익혀 소양을 겸비했던 윤씨 부인은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률(當律)..

(얼레빗 4490호) 홍역에서 정약용을 살린 명의 이헌길

요즘은 우리는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처럼 돌림병이 돌면 속수무책이었는데 영조 때만 해도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홍역으로 50~6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조 임금 때인 1775년(영조 51) 이헌길은 한양에 갔다가 삼태기에 싣고 나가는 홍역으로 죽은 주검이 잠깐에 수백 명이나 되는 것을 보고, 상주의 신분임에도 백성을 구해야 한다며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이헌길은 홍역에 관한 한 최고의 의술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비방을 얻은 사람은 죽을 지경이다가도 살아나고, 열이 오르다가도 내렸기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홍역 환자를 치료하는 집 앞에는 사람들이 골목까지 줄을 설 정도였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병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다..

(얼레빗 4473호) 큰 값어치의 조선시대 백과사전 《임원경제지》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 격인 책들이 나왔습니다. 먼저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芝峰類說)》이 시작이고, 영조임금의 명으로 1770년에 나온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성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따위가 그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조선 후기 때 문신이자 학자인 서유구(徐有, 1764~1845)가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책 900여 종을 참고로 하고 시골 마을에서 보거나 수집한 문헌 자료를 정리해서 1827년(순조 27)에 엮어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백과사전의 하나입니다. ▲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규 《임원경제지》는 농업 일반을 다룬..

(얼레빗 4311호) 우리말로 시문을 써야 한다고 한 김만중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국문가사예찬론’에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한문을 ‘타국지언(他國之言, 다른 나라의 말에 불과함)’으로 보았으며, 정철(鄭澈)이 지은 <사..

(얼레빗 4189호) '날틀’, 진주대첩 때 진주성의 희망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진주 목사 김시민이 3,8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백성과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을 해왔고 이때 민ㆍ관ㆍ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얼레빗 3991호) 인두로 지져서 그림을 그리는 ‘낙화장’

한국문화편지 3991호 (2019년 01월 14일 발행) 인두로 지져서 그림을 그리는 ‘낙화장’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91][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7일 문화재청은 <낙화장(烙畵匠)>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김영조(金榮祚, 남, 1953년생, 충청북도 보은군) 선생을 보유자로 인정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