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3

아우내 만세운동 주역 처음 밝힌 ‘김구응 열사 평전’

“나는 오래전 4·1아우내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아우내(병천, 竝川)에 수년 동안 머무르면서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과 생가, 열사를 기념하는 공원을 나의 산책 코스로 정하고 거의 날마다 그곳을 거닐었다. 그러면서 나는 유관순 열사의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는 《김구응 열사 평전》(틈새의 시간 출간)을 쓴 전해주 성공회 신부의 말이다. 전해주 신부는 충남 아우내(병천) 성공회교회에서 사제로 지내면서 뜻밖에 ‘4·1아우내 만세운동’의 주역이 유관순 열사(이화학당 유학생, 당시 17살)가 아닌 당시 지역 유지이자 아우내에 첫 근대식 학교인 청신의숙(靑新義塾)을 세우고 더 나아가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김구응 열사(당시 32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 《김구..

유관순 열사의 절규

유관순 열사의 절규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이 절규의 글을 읽을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아픔을 느낀다. 나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절절했으면 소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 강병인의《나의 독립》중에서 - * 우리는 때때로 유관순 열사의 절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통한의 과거 역사를 한시라도 망각하면 안됩니다. 결코 과거 역사가 아닙니다. 오늘과 내일의 역사입니다. 결코 먼 조상의,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돌면서 반복됩니다. ..

고문으로 얼굴 붓지 않은 '어린 유관순' 찾았다

유관순 열사(1902∼1920년)의 13세 때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28일 공개됐다. 전문가들은 사진 속 인물이 유 열사가 거의 확실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유 열사가 충남 공주 영명학교 재학 중이던 1915년 촬영된 단체사진에서 유 열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는 사진을 발굴해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이날 밝혔다. 연구원은 전문가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단체사진 중 앞에서 세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인물을 유 열사로 추정했다. 박병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은 “전문가를 통해 수형복을 입은 유 열사의 기존 사진과 단체사진에 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대조한 결과, 해당 인물이 유 열사로 추정된다는 답변을 얻었다”고 밝혔다. 연구원 관계자는 “10대 중반에는 얼굴과 체형의 변화가 크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