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원왕후 3

(얼레빗 4601호) 숙종의 장인, 궁궐에서 나막신만 보고 다녀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숙종임금의 장인인 김주신(1661~1721)의 무덤이 있습니다. 김주신의 딸은 숙종의 둘째 왕비인 인원왕후로 그가 한글로 쓴 《션균유사》에 "아버님은 궁궐을 출입할 때마다 근신하여 나막신의 앞부분만 보고 다녀 10년이나 아버지를 모신 나인도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김주신은 겸손한 선비였습니다. 왕비가 된 딸에게 그렇게 부담을 지우지 않게 했을 뿐 아니라 김주신은 홀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자로도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김주신은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라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겨 글공부에 전념하였지요. 어머니가 밤늦도록 글 읽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자 김주신은 밤늦은 시간에는 목소리를 낮추어 어머니의 걱정을 덜었을 만큼 어머니를 ..

(얼레빗 4449호) 선조, 인원왕후 언문(한글)으로 교지를 쓰다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이후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궁궐 내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선조는 심지어 공식 문서인 교지에도 언문을 썼습니다. 선조가 교지를 언문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조실록》 25년(1592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諺書)로 방문(榜文, 길거리나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백성을 알아듣도록 하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 원활한 의사소통..

5월 2일 - 효 되새기기 둘, 효자 김주신

효자에 속하는 초나라 현인 노래자(老萊子)는 나이 70에 아이 옷을 입고 아이 같은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습니다. 그런 효자가 우리나라 숙종 때에도 있었지요.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아버지 김주신(金柱臣, 1661~1721)은 아버지 김일진이 세상을 뜨자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모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