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각 3

(얼레빗 제5071호) 영조 임금, 넘쳐흐르는 청계천 바닥을 파내다

‘준천(濬川)의 대책은 역시 모색하기 어려운 일이더니,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 이미 조그마한 책자를 하나 만들도록 명하여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책이 완성된 뒤에는 서문을 지어 내리겠다. (가운데 줄임)’ 살펴보건대, 준천의 역사에 역민(役民)이 여러 십만 명이나 동원되고 경비(經費)도 십만여 전(錢)이나 소모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안위(安危)가 걸린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인가? 위는 《영조실록》 95권, 영조 36년(1760)년 3월 16일 기록으로 청계천 준천에 관한 내용입니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한양은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전국 각지에서 이주민이 몰리면서 거주지 부족 현상이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개천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집단 거주지를 형..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세종과 운명적 조화를 이룬 신숙주

각종 언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세간에 나온 책 중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고 문장력이 좋아 22세 되던 해인 1439년(세종 21)에는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조정에 들어간 후 신숙주는 종종 장서각(藏書閣, 조선의 국가 사적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기관)에 들어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책을 찾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읽는 등 책을 남달리 사랑했다. 어느 날은 신숙주가 장서각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세종의 어의(御衣)가 그의 등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 신숙주의 학구열에 세종도 감동한 것이었다. 풍부한 독서량 덕분인지 신숙주는 언어 감각이 탁월했다. 그가 26세 되던 해인 1443년..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3), 교명과 고명

3) 교명과 고명 교명(敎命)은 국왕이 왕위를 물려주거나 왕비와 왕세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훈유문서이다. 국왕이 왕비를 책봉할 때는 교명, 옥책, 금보를 주고, 왕세자를 책봉할 때는 교명, 죽책, 은인을 주었다. 교명은 옥축(玉軸)에 비단으로 감싸서 만든 두루마리로, 오색 비단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교명의 시작 부분에 용 두 마리가 오르내리는 사이에 ‘교명(敎命)’이라는 전서체 글자를 직조하여 넣었다. 교명에는 조선왕보(朝鮮王寶)와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은 것이 있다. 교명의 내용은 그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 준다. 조선 전기에는 국왕이 왕위를 물려줄 때에도 교명을 내렸다.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할 때,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할 때,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 교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