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왕의 상징물 5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상징물을 보관했던 종묘

종묘는 조선의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국왕의 신주는 삼년상을 지나면 바로 종묘로 모시지만, 왕비의 신주는 별도의 사당에 모셨다가 국왕이 사망한 후 함께 종묘에 모셨다. 종묘의 정전에 모셨던 국왕과 왕비의 신주는 4대가 지나면 종묘의 영녕전으로 옮겨서 모시게 된다. 현재 종묘의 정전에는 국왕을 지낸 27명 가운데 18명과 추존된 국왕 1명을 합 하여 19명의 국왕과 왕비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나머지 국왕과 왕비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국왕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종묘에 모셔진 국왕과 왕비의 신주는 왕실의 정통성을 반영한 것이다. 종묘에는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실이 있다. 각 신실의 북쪽에는 감실을 설치하고, 그 중앙에 신주장을 두며..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3), 교명과 고명

3) 교명과 고명 교명(敎命)은 국왕이 왕위를 물려주거나 왕비와 왕세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훈유문서이다. 국왕이 왕비를 책봉할 때는 교명, 옥책, 금보를 주고, 왕세자를 책봉할 때는 교명, 죽책, 은인을 주었다. 교명은 옥축(玉軸)에 비단으로 감싸서 만든 두루마리로, 오색 비단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교명의 시작 부분에 용 두 마리가 오르내리는 사이에 ‘교명(敎命)’이라는 전서체 글자를 직조하여 넣었다. 교명에는 조선왕보(朝鮮王寶)와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은 것이 있다. 교명의 내용은 그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 준다. 조선 전기에는 국왕이 왕위를 물려줄 때에도 교명을 내렸다.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할 때,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할 때,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 교명..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2), 어책

2) 어책 어책(御冊)에는 왕세자 시절에 받는 죽책(竹冊)과 국왕 시절에 받는 옥책(玉冊)이 있다. 죽책은 국왕이 왕세자․왕세자빈을 책봉할 때와 존호 및 시호를 수여할 때 사용하였다. 왕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교명, 죽책과 함께 은인을 주었다. 죽책은 죽간 5~6조각을 책자 형태로 엮어 해서체 글자를 새기고 글자에 니금(泥金)을 입히며, 변철로 고정하여 둥근 고리와 돌쩌귀로 연결한다. 죽책의 앞뒷면은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죽책의 문장은 사륙변려문을 쓰며, 착한 일을 권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내용이다. 효명세자는 1812년(순조 12) 7월 6일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세자 책봉식을 거행하였다. 세자의 나이는 4세였다. 다음은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내린 죽책문의 내용이다. 저사(儲嗣, 후계자)를 ..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1), 어보

1) 어보 어보(御寶)는 국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말한다. 왕세자 시절에 받는 은인(銀印)과 국왕 시절에 받는 금보(金寶)가 있다. 국왕의 새로운 이름이 정해지면 이를 기록한 어보와 어책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국왕이 새로운 이름(존호, 묘호, 시호, 전호, 능호)을 받을 때마다 어보는 새롭게 만들어졌다. 국왕이 왕세자를 책봉할 때 교명(敎命), 죽책(竹冊)과 은인(銀印)을 내렸다. 왕세자의 은인에는 ‘왕세자인(王世子印)’이라 새겼다. 왕세자인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때는 대리청정을 할 때이다.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 왕세자의 명령서나 관리 임명장에 이 은인이 찍혔다.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을 때 받는 책봉인도 어보에 해당한다.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 새겨진 책봉인은 중요한..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2) 시호, 전호, 능호

3) 시호 시호(諡號)는 국왕이 사망한 후 살아있을 때의 언행을 참조하여 정하는 이름이다. 국왕의 시호에는 신하들이 의논하여 올리는 시호와 중국 황제가 정하여 내리는 시호가 있었다.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는 국왕이 사망하고 5일이 지난 후 입관 (入棺)을 하고 나서 의논하였다. 시호의 글자 수는 대개 8자였고, 글자 하나하나에 국왕의 일생을 평가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에 정조가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7월 6일에 의정부와 관각(館閣)의 관리들이 정조의 시호, 묘호, 전호, 능호를 정하여 올렸다. 시호는 문성무열 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 묘호는 정종(正宗), 전호는 효원 (孝元), 능호는 건릉(健陵)이었다. 시호는 글자별로 뜻이 있었다. 경천위지(經天緯 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