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와 사직 4

(얼레빗 제4826호) 모내기 전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

“상이 하교하기를, ‘막 병란(兵亂)을 겪었는데 또 전에 없는 가뭄과 우박의 재해를 만났다. 며칠 내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침식조차 잊고 만다. 지금, 이 재변은 실로 내가 우매한 탓에 일어난 것으로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비를 빌고자 한다. 해당 조에 말하라.’ 하였다. 예조가 날을 가리지 말고 기우제를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인조실록》 인조 6년(1628년) 5월 17일 기록입니다.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던 조선시대엔 모내기 전인 망종과 하지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까지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고, 나라를 잘못 다스려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 하여 임금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고 음식을 끊기까지 했으며,..

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왕의 복식

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조선 왕실의 옷장을 열다 - 박 가 영 숭의여자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교수 궁중에서 왕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서 수라라고 이르듯이, 왕의 옷을 높여서 의대(衣襨)라고 하였다. 왕 뿐 아니라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의 옷과 장신구, 옷을 만드는 재료, 침구류에 이르기까지 총칭하는 단어가 의대이다. 한편, 법복(法服)은 궁중의례 때 예법에 맞추어 규정대로 착용하는 복식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매일 원하는 옷을 마음대로 골라서 입을 수 없었고, 시간과 장소와 상황, 즉 의례에 따라 각 신분별로 착용해야 할 복식이 정해져 있었다. 자세한 규정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같은 법전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같은 전례서에 정리되어 있었으며, 이 기본원칙을 바탕으로 선례를 확인하면서..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1) 존호, 묘호

1. 국왕의 이름 조선 국왕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다. 국왕에게는 어릴 적 이름인 아명(兒名), 원래의 이름인 원명(原名), 성인식인 관례를 거행할 때 받는 자(字)와 별도의 이름인 호(號)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양반사대부도 가질 수 있는 이름이었다. 국왕의 원명은 왕세자로 책봉할 때 정해졌다. 종묘와 사직에서 왕세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리려면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순종이 왕세자로 책봉될 때 신하들은 세 가지 후보로 척(坧), 전(㙉), 지(土+示)를 올렸고, 고종이 첫 번째 글자에 낙점하 였다. 자는 성인이 되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이름 대신에 지어주는 이름으로 해당 인물의 덕을 나타낸다. 존호(尊號), 묘호(廟號), 시호(諡號), 전호(殿號), 능호(陵號)는 국왕과 왕비에..

(얼레빗 4445호) 대한제국 탄생, 황제 금색 오조룡보 입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함께하였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룡포를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금빛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 어진, 180×104cm, 국립중앙박물관 위는 《고종실록》 고종 34년(1897년) 10월 12일 기록으로 123년 전 오늘 고종 임금은 나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