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보문헌비고 3

(얼레빗 제4822호) 황사, 《조선왕조실록》에는 ‘흙비’라 해

"이제 흙비가 내렸으니 하늘이 내리는 벌이 가볍지 아니하다. 예전에 수(隋)나라 황제가 산을 뚫고 땅을 파며 급하지 아니한 역사(役事)를 하자 마침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번거롭게 일으키므로 백성의 원망이 ’흙비‘를 부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숭례문(崇禮門)의 역사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급하지 아니한 역사는 아니겠는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 이는 《성종실록》 성종 9년 4월 1일(1478년) 기록입니다. 이런 흙비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183번이나 나옵니다. 심지어 태종 6년(1406년)에는 동북면(東北面) 단주(端州, 함경남..

칼을 휘두르며 추는 검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예술이 됩니다. 바로 ‘검무’를 말하는데 ‘검기무(劒器舞)’ 또는 ‘칼춤’이라고도 하지요. 『동경잡기(東京雜記)』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검무의 유래가 나옵니다. 신라 소년 황창(黃昌)이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의 왕을 죽이고 자기도 죽자, 신라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 얼굴을 본떠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종 때 펴낸 『악학궤범』에 나와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성행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 뒤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이 쓴 라는 칠언고시에 따르면 기녀들이 가면 없이 추었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민간사회로 나온 기녀들이 계속 검무를 추었지만, 일부 지방에서만 그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얼레빗 4401호) 어려운 이들 물폭탄으로 고통받아

동아일보 1934년 8월 9일 치 기사 가운데는 “구조받어 연명중, 병마까지 엄습, 주먹밥도 끈허저 나물죽, 설상가상의 선산 재민”이라는 제목이 보입니다. 경북 선산에선 큰물(홍수) 탓에 이재민 3천여 명이 주먹밥으로 근근이 연명해오다가 그나마도 끊어지고, 보리죽과 나물죽으로 그날그날의 생명을 연명하는 가운데 돌림병까지 돌아 신음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물난리는 지금뿐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큰물이 나서 사람들이 죽고 많은 집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특히 정조실록 13년(1789년) 7월 26일 기록에는 함경북도 명천에서 물난리로 물에 떠내려가거나 깔려 죽은 사람이 5백 46명이고,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집이 5백 70채였다고 합니다. 또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1854년 7월 전라도에서 큰물이 나서 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