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학사 3

낙락장송으로 남은 지성인 성삼문

단종에 대한 마음을 시조로 읊조렸던 성삼문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지금도 널리 추앙받고 있다.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훈민정음의 보급에도 애쓴 성삼문,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몸이 주거 가셔 무어시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 성삼문 21세의 젊은 학사 성삼문 성삼문은 조선의 수재였다. 1435년 생원시 합격, 1438년 식년문과 급제, 1447년 문과중시 장원급제…, 성삼문의 화려한 이력이 이를 말해 준다. 세종대왕은 일찌감치 성삼문을 조선을 이끌어 갈 인재로 점찍고 1438년 21세의 성삼문을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그리하여 성삼문은 세종대왕을 보필하며 신숙주, ..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운 정의(貞懿)공주

정의공주의 생애 세종 때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특히 가족으로 세종을 도운 부인 소헌(昭憲)왕후와 딸 정의공주(1415년 ~ 1477)가 있다. 세종은 딸 2명과 아들 8명을 두었다. 맏딸 정소(貞昭) 공주와 맏아들 이향(李珦, 문종)에 이어 둘째 딸 정의 공주다. 세종은 그 밖에 아들 7이 더 있다. 정의공주는 세종 즉위 전에 출생하였다고 하나 다만 오빠 문종(文宗)과 동생 세조(世祖) 사이에 태어난 사실에 비추어 태종 15년(1415)~16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세종 10년(1428)에 정의공주에 봉해졌고, 안맹담(安孟聃)과 가례를 치렀다. 안맹담은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그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다. 이후 안맹담은 계유정난에 협조하여 성록대부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