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12

(얼레빗 제5094호) 투전하려고 아내의 치마를 벗겨가

“도박(賭博)놀이를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도대평(都大平) 등 16인에게 각각 장(杖) 80대를 때리고, 또 장용봉(張龍鳳)에게 장(杖) 1백 대를 때리고, 그 스스로 서로 도박하여 얻은 물건은 관(官)에 몰수하였다. 대개 도박놀이는 고려 말년에 성행하였는데, 비록 큰돈이라도 하루아침에 도박하여 얻어서 벼락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경박한 무리가 요행히 따기를 바라고 이 짓을 하다가 처자(妻子)를 빼앗기고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는 자가 있기에 이르니, 태조(太祖)가 먼저 그 놀이를 금지하였고, 이 때에 이르러 임금이 남은 풍속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듣고, 이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체포하고 엄중히 금지하였다.” 이는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1414년) 5월 19일 기록입니다. 이때로부터 400년..

(얼레빗 제5093호) 세종에게 악역을 마지않았던 황희

“유정현(柳廷顯)을 의정부 찬성으로 삼고, 유관(柳觀)을 의정부 참찬으로, 황희(黃喜)를 이조 판서로, 박신(朴信)을 병조 판서로, 윤향(尹向)을 형조 판서로, 성발도(成發道)를 판한성부사로, 심온(沈溫)을 호조 판서로, 정역(鄭易)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는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1415년) 5월 17일 기록입니다. 여기 태종이 이조판서로 삼았던 황희(黃喜, 1363~1452)는 태종(太宗)이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지명할 때 반대해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으로 폐해지고 유배에 처할 정도였습니다. 세종이 그런 황희를 등용하려 할 때 많은 중신이 반대하자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라며 이를 일축했습니다. 그 뒤 황희는 단연 세종대..

(얼레빗 제5081호) 중국ㆍ원나라에 처녀 바치려 금혼령 내리기도

"진헌색(進獻色, 중국 황제에게 특별한 선물을 할 때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둔 임시 관아)을 설치하여 여자아이를 모으고, 조정과 민간의 혼인을 금하였다.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남재(南在)ㆍ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함부림(咸傅霖)ㆍ한성윤(漢城尹) 맹사성(孟思誠)으로 제조(提調)를 삼고, 경차관(敬差官,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슬)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처녀를 뽑게 하였는데, 천한 백성과 노예를 뺀 양갓집 처녀 13살 이상 25살 이하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 위는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1408년) 4월 16일 자 기록으로 중국 황제에게 선물하기 위해 조정과 민간의 혼인을 못 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 왕비나 세자빈과 공주의 사위를 고를 때 온 나라에 금혼령..

(얼레빗 제4974호) 백제 비류왕 때 쌓은 김제의 ‘벽골제’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는 신도 또한 한 번 가서 보았는데, 그 둑을 쌓은 곳이 길이가 7천1백 96척(1척≒ 30.3cm, 약 2.18km)이고 넓이가 50척(약 15m)이며, 수문이 네 군데인데, 가운데 세 곳은 모두 돌기둥을 세웠고 둑 위의 저수한 곳이 거의 일식(一息, 30리로 약 11.79km)이나 되고, 뚝 아래의 묵은 땅이 광활하기가 제(堤, 방둑)의 3배나 됩니다. 지금 농사일이 한창이어서 두루 볼 수 없으니, 농한기를 기다렸다가 상하의 형세를 살펴 다시 아뢰겠습니다.” ▲ 지금은 벽골제 제방을 따라 작은 수로만 남아있다.(최우성 기자) 위는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8월 1일 치 기록으로 전라도 관찰사 박습이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에 관해 아뢰는..

(얼레빗 제4894호) 통행금지를 어긴 사헌부 대사헌 파직돼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기억에 남아 있을 ‘통행금지‘. 광복을 맞으면서 시작된 통행금지는 1982년 1월까지 시민들의 발목을 잡았는데 광복 직후엔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1961년부터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가 통금시간이었습니다. 동무들하고 신나게 놀다가도 통금시간이 다가오면 ‘오금아 날 살려라’라면서 집으로 줄행랑을 쳤었지요. 어떤 이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꾀를 낸다는 것이 장승처럼 멀뚱히 서 있다 여지없이 잡혀 파출소행을 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통행금지가 물론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조선이 개국 되자마자 치안과 화재 예방을 위해 한성을 비롯해 주요 도시와 국경지방에까지 통행금지 시간을 두었지요. 시계가 없던 시절 성문이 닫히고 통금이 시작되는 때를 “인정(人定)”이라 ..

(얼레빗 제4876호) 조선 태종 때 코끼리를 귀양보냈다

“코끼리는 일본에서 바친 것인데, 임금께서 좋아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이 코끼리가 두 사람을 죽였기에 법에 따르면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한해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 중국 주 왕조를 세운 무왕의 동생)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옛일을 본받아 전라도 섬에 두소서.” ▲ 코끼리를 귀양보낸 일이 기록된 《태종실록》 이는 《태종실록》 제26권 태종 13년(1413년) 11월 5일 기록으로 이에 따르면 코끼리에 대해 병조판서 유정현이 임금에게 아뢴 내용입니다. 이에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고 하지요. 이 코끼리는 원래 태종 11년(1411년 ) 일본 왕이 우리나라에 없는 코끼리를 바쳐 이를 사복시(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얼레빗 제4826호) 모내기 전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

“상이 하교하기를, ‘막 병란(兵亂)을 겪었는데 또 전에 없는 가뭄과 우박의 재해를 만났다. 며칠 내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침식조차 잊고 만다. 지금, 이 재변은 실로 내가 우매한 탓에 일어난 것으로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비를 빌고자 한다. 해당 조에 말하라.’ 하였다. 예조가 날을 가리지 말고 기우제를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인조실록》 인조 6년(1628년) 5월 17일 기록입니다.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던 조선시대엔 모내기 전인 망종과 하지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까지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고, 나라를 잘못 다스려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 하여 임금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고 음식을 끊기까지 했으며,..

(얼레빗 4697) 용이 읊조리는 소리 <수룡음> 들어볼까요?

혹시 용이 읊조리는 소리 들어보셨나요? 용(龍)은 상상의 동물이어서 우리가 그 소리를 들어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국악 연주곡 중 이란 음악은 그 이름에 “용이 읊조린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수룡음은 본래 가곡의 반주음악을 노래 없이 기악으로만 연주하는 음악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자진한잎’, ‘사관풍류’라고도 하지요. 가곡의 반주는 원래 대금, 세피리, 해금, 거문고, 가야금, 장구 따위로 하는데 특히 수룡음은 관악기 가운데서도 생황과 단소의 병주(생소병주)로 즐겨 연주합니다. ▲ 을 연주하는 생황(왼쪽)과 단소 《태종실록》 2년(1402년) 6월 5일 자 기록에 보면 예조에서 궁중 의례 때 쓰는 음악 10곡을 올리는데 10곡을 고른 까닭을 다음 같이 말합니다. “신 등이 삼가 고전(古典)을 돌..

옥황상제도 홀린 금강산의 절경

옥황상제가 금강산의 경치를 돌아보고 구룡연 기슭에 이르렀을 때, 구룡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는 관冠을 벗어 놓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때 금강산을 지키는 산신령이 나타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큰 죄다”라고 말하고 옥황상제의 관을 가지고 사라졌다. 관을 빼앗긴 옥황상제는 세존봉 중턱에 맨머리로 굳어 바위가 되었다. 금강산에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금강산이 얼마나 절경이었으면 옥황상제마저 홀렸을까요? 심지어 중국인들조차 금강산에 가보는 게 소원이라 할 정도였지요. 『태종실록』 4년(1404년) 9월 21일 기록에는 태종이 이렇게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속언에 말하기를, 중국인에게는 ‘고려 나라에 태어나 ..

(얼레빗 4611호) 남의 부모도 내 부모처럼, 수양부모

얼마 전 우리는 “경찰, 입양아 폭행 양부 구속영장…의식불명 상태”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보았습니다. 지난 5월 11일은 입양문화의 정착과 국내 입양의 활성화를 위하여 만든 “입양의 날”이었지요. 여기서 수양부모(收養父母)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수양아버지와 수양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데려다 길러 준 부모를 이른다.”라고 풀이합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받아들이는 수양부모 풍습이 있었으며 친부모가 있어도 자식의 수명을 길게 하려고 수양부모를 삼기도 했습니다. ▲ 수양아들은 수양어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했다.(그림 이무성 작가)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4월 24일 기록에 보면 ‘군사의 수양부모에 대한 상례규정’을 정하는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