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힌샘 주시경 5

주시경 서거 110주년과 그 의미

지난 7월 27일은 주시경 선생이 세상을 뜬 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힌샘 주시경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긴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평생을 바친 국어학자이다. 우리 말과 글을 체계화해 ‘오늘의 한글’을 있게 한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맞춤법의 뼈대는 모두 그의 연구로부터 체계화되었다.  ‘한글’이라는 이름 역시 주시경이 조직한 ‘국어연구학회’의 우리말 명칭인 ‘배달말글몯음’이 ‘한글모’로 바뀐 데에서 비롯되었다. 주시경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인 ‘말모이’는 1910년대 조선광문회에서 전국 각지의 말을 모아 사전을 편찬하려던 작업이지만 주시경의 이른 서거로 중단되고 만다. 관련 내용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또한 최초의 순우리말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을 발..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10, 한글과 나라에 모든 삶을 바친 주시경

개화기에 들어오면서 선각자들은 구국운동으로 우리글을 살려 발전시키려 하였습니다. 유길준은 1895년 《서유견문》에서 역사상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하여 언문이 일치하는 문장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이듬해 서재필은 처음 띄어쓰기까지 하는 순 한글로 된 을 발간했습니다. 띄어쓰기는 전번 이야기의 헐버트가 자신이 저술한 《사민필지》를 읽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는 띄어쓰기가 필요하다고 여겨 주시경과 상의해 띄어쓰기와 마침표 등을 도입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지석영, 이익로, 최남선 등 많은 선각자가 한글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그 가운데 대표로 주시경 선생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시경은 한마디 말로 450년 동안이나 묻히다시피 하여있던 훈민정음을 다시 발굴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새 생명을 불..

주시경의 유산

별이 지다 국문 연구, 말모이 편찬, 한글 강습 등으로 불철주야 장안을 누비던 주시경이 1914년 7월 27일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제자 김윤경은 주시경 선생은 1911년 일제가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사건의 여파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망명을 결심하고, 방학 때에 고향 부모를 찾아뵈었으며, 서울로 돌아와 떠날 준비를 하던 중에 ‘체증’으로 돌아가셨다고 썼다(김윤경, 「주시경 선생 전기」, 『한글』 126(1960)). 돌연한 스승의 죽음에 제자들은 통곡했다. 김두봉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라며 슬퍼했고, 스승의 부탁으로 동래군 동명학교 하기강습회에서 수업을 하던 중 부음을 들은 최현배는 강습생들과 함께 대성통곡했다. 생전의 주시경은 상동청년학원을 비롯해 공옥학..

실천적 지식인 주시경 선생의 업적

세종이 1443년 12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많은 책을 훈민정음으로 펴냈다. 특히 의서ㆍ농서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책과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한 교훈서 등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백성ㆍ국민을 위하고자 하는 정책에는 기득권 세력의 거센 도전이 따른다. 당시 최만리 등 조정의 중신들과 각지의 유생들이 드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의 예에 어긋나며,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는 나라는 오랑캐들뿐’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군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였지만 지배층에서는 19세기까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비하하고, 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글로 치부하였다. 말(언어)은 한국어로 하면서 글(씨)은 한문으로 쓰는 실정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