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지인이 해발 600m 산 정상에서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3개월 전이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할 때 기생충학을 하면 대박이 난다고 힘을 실어줬던 고마운 친구인지라 한번 가야지 했는데, 시간이 없다 보니 지난 주말에야 그 산에 오를 수 있었다. 힘들게 꼭대기에 오르자 GH상담소라는 간판이 달린 막사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 몇 명이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문 앞에 조그만 메모가 붙어있다. ‘사정상 폐업합니다. 상담소장 백.’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날 부른다. “서민씨죠? 저희 소장님이 이걸 좀 전해 달라고 해서요.” 내가 올 것을 미리 알았다니, 정말 내공이 출중한 친구구나 했다. 뭔가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산 정상에 앉아 지인이 남긴 봉투를 열어봤다. 그건 그가 했던 상담기록이었다.
-꿈 많은 중1 학생입니다. 저는 무조건 부자가 되고 싶어요. 수단 방법은 가리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검사가 되세요. 그리고 기업을 경영하는 스폰서를 구하면 됩니다. 스폰서가 주는 주식을 갖고만 있으면, 오래지 않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까 그 중1 학생입니다. 추가로 질문이 있어서요. 그렇게 하면 부자는 되겠지만, 감옥에 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제가 아는 검사 한 분도 그 짓 하다가 구속됐거든요.
“하하, 매사 신중한 학생이군요. 좋습니다. 제가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어떻게든 줄을 대서 민정수석이 되세요. 그러면 아무리 큰 비리를 저질러도 끄떡없을 겁니다. 조사받으러 오라고 해도 ‘대통령을 보좌하는 큰일을 하고 있어 갈 수 없다’라고 하면 되니까요.”
-급합니다. 친구를 살짝 밀었는데 그만 땅에 머리를 부딪쳤어요. 4시간째 숨을 안 쉬는데 죽었으면 어쩌죠? 저는 이제부터 살인자인가요?
“4시간이나 지났다니 너무 늦었네요. 친구분의 명복을 빕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제가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친구분을 데리고 빨리 서울대병원에 가세요. 거기서 백씨 성을 가진 교수를 찾으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아니, 심장이 안 뛰네? 이분의 사인은 심정지에 의한 병사야.’ 당신은 더 이상 살인자가 아닙니다.”
-딸이 하나 있는데, 공부를 안 해요. 고1인데 맞춤법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인성이라도 좋으면 그걸로 수시전형에 한번 넣어 볼 텐데, 천하에 둘도 없는 개싸가지라서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고로 저는 돈이 아주 많은 사모님입니다.
“일단 말을 사세요. 아주 비싼 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승마코치를 구하세요. 2018년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딴다면, 인서울 중에서도 명문인 이화여대에 입학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죄송합니다. 이대가 학점관리가 살벌하다던데, 그렇게 해서 붙은들 안 잘리고 졸업할 수 있을까요?
“별걱정을 다하시네요. 이대가 그렇게 소문이 났지만, 교수들은 학생을 상전으로 모십니다. 승마 핑계 대고 학교를 안 가도 출석으로 인정해 주거든요. 제가 아는 분도 그런 식으로 3.0이 넘는 학점을 땄어요. 교수가 협조를 안 하면 지도교수를 바꾸면 됩니다. 남자랑 눈이 맞아 임신만 하지 않는다면 졸업하는 건 문제없습니다.”
-살이 쪄서 고민이에요. 무엇보다 식성이 너무 좋은 게 문제예요. 먹을 것을 보면 참지 못하거든요.
“집권당 대표가 되세요. 그러면 단식할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제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면 겁이 나고, 제 말을 들은 이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일자리도 구해야 하는데 이래 가지고 어디 취직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통령이 되세요.”
-러시아에 살고 있는 이스키 정현스키입니다. 삶이 너무 무미건조해요. 이곳은 너무 춥고, 재미있는 일도 없어요. 늘 황량합니다.
“일단 한국국적을 따세요. 한국에 대해 관심이 생길 테고, 무미건조 같은 소리는 안하게 됩니다. 지상 최대의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매일 밤 펼쳐지거든요.”
-현직 대통령입니다. 제가 숨기고 싶은 비리가 터져 나와 정신이 없네요. 이 난국을 돌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통령 각하, 이렇게 뵙게 돼 영광입니다. 대통령께서 전에 ‘개헌은 국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 그 블랙홀을 쓸 적기입니다.”
그로부터 3주 뒤, TV에서는 개헌을 한다는 대통령의 말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시는 그 지인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그런데 읽는 내내 궁금했던 게 있다. GH는 뭐의 약자일까? 그 친구의 이름은 TM인데, GH는 도대체 뭘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개 같은 한국’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가만, 개(G) 같은 한국(H)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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